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그리스인 조르바


 


 


 


굉장히 문학적으로 읽혀지게 되었던 인문서적을 접한다.


 


자신의 삶에 빗대어 살아온 날의 기억들과 가야할 길, 반성과 권유의 점철된 이야기.를 접했다


 


 


~~~~~~~~~~~~~~~~~~~~~~~~~~


 


시작하며


 


내 삶의 두 축은 '학문'과 '참여'다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이다.


자신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신이 무엇에 들뜨고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아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호모 아카데미쿠스 - 공부하는 인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소리'를 무시하고 학교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고통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데 길들여지면 죽을 때까지 행복은 유보될 것이다.


 


성적을 위한 공부든, 세상을 알기 위한 공부든,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공부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모두가 공평하게 공부하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으로도 내면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도 정신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도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과 계획이 시작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도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자기 판단으로 목표를 정하고 즐겁게 뛰는 '경주력'을 키워야 한다.


 


공부는 바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관심을 놓지 않는 사람.


긍정적 변화를 꿈꾸고 노력하는 사람.


나를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기를 즐기는 사람.


 


존 롤즈 曰 " 가장 중요한 선"으로 자존감을 꼽는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것도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비록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모든 욕구와 활동은 공허하게 되고 우리는 무감각과 냉소에 빠지게 된다."


 


스피노자는 렌즈 가공기술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철학을 연구했고,


카프카는 법학학사 학위를 받고도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소설을 썼으며,


T.S.엘리엇은 은행원으로 일하며 시를 썼고,


조지 오웰은 교사, 서점 직원, 잡화점 주인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소설을 썼다


 


청나라 괴이문학의 걸작이라 불리는 포송령의 <요재지이>에서 나온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다


 


법학은 세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세상의 분쟁과 갈들을 다루며 법과 제도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대책을 강구하는 학문이 법학이다.


 


세상을 잘 살려면 자신의 능력 소질, 환경 등에도 잘 맞고, 의미와 재미도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일을 발견했다면 그 이후의 승부는 일상의 삶에서 결정이 난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면 일상의 삶에 충실하고 또한 이를 장악해야 한다.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며, 공부의 성공 조건은 노력이다.


 


 


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많은 세월이 흘러 과거를 돌아보면 당시 그릇됐다고 간주된 것이 사실은 올바른 것이었고,


올바르다고 여겼던 것이 그릇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는 역사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가난이야말로 최고의 폭력임을 똑똑히 보았다.


 


공부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끊임없이 생겨나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이론적 실천적 기반을 닦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관점을 빌리면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는 '입증'되고 말고 할 과학적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윤리적 당위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삶에서 실천으로 '구현'해야 할 문제"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에서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질타했다.


그는 "살인하지 마라"는 십계명이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을 죽이고 있는 배체와 불평등의 경제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마라"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십계명이라는 말씀이다.


 


겁내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죽지 마라.


쫄지 마라.


길들여지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그리고 저항하라.


 


변화는 내면의 작은 용기에서,


즉 저항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공부를 할수록 그 용기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호모 쥬리디쿠스 - 정의로운 인간


 


'헌번적 형사법'의 본고장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로스쿨은 공립 로스쿨이다.


1960년대 미국 대학 내 정치활동과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보장을 위해 벌어졌던


'자유언론운동'의 발상지


 


법 공부를 잘 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 지향적 학문'이지 '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다른 학문을 알아야 한다.


법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학문의 시각과 성과를 흡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법학은 편벽하고 건조한 개념과 논리의 묶음에 머물고 말 것이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법의 가식에 대해서는 항상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햐 한다.


그러나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남아공 헌법재판관 알비 삭스


 


 


방향은 올바르게 잡혀 있다. 다만 아직 힘이 모자랄 뿐이다.


 


1849년에 소로曰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신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히다."


 


 


존 롤즈曰('차등의 원칙')


"모든 사회적 가치들- 자유, 기회, 소득, 재산 및 자존감의 가반-은 이들 가치의 전부


또는 일부분의 불평등한 분배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단순한 불평등은 부정의가 된다."


 


'중용'의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曰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가 '중용'이다.


중용은 현실의 부정의와 부당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서 최상 최적의 현실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심성과 자세를 뜻한다.


 


형상법은 인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법은 단지 법죄를 처벌하는 것만 아니라 인권을 보호하는 거도 사명으로 하고 있다.


 


형법은 범죄와의 투쟁 도구인 동시에 국가형벌권에 의해 시민이 부당하게 억압받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이라면 모든 것을 배우되 단 포기만을 배우지 말라고 하고 싶다.


언제나 공부하고 연대하고 도전하길 바란다.


 


미국 헌법의 이해 (안경환,박영사)


1989년 발표하신 논문 [미란다 판결의 현대적 의의]를 읽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묵비권과 변호인 접견권 등 형사절차적 권리 보장의 혁명을 이룬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대한 판결이 가슴을 뛰게 했기 때문이다.


 


 


호모 엠파티쿠스 - 공감하는 인간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이 하위 법률인 형법과 민법으로 인해 껍데기로 전락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경제적 기본권은 아직도 취약하다.


이 문제가 빨리 중요한 사회의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만드는 법제는 바꾸어야 한다.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정치에 함몰되어선 안된다.


 


나만을 위해 하는 공부는 별로 매력이 없다.


우리를 위한 것이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


 


사람냄새가 더 많이 나도록 하는 것이 내 공부의 목표다.


 


 


마무리 하며


 


'당신이 걷는 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공격이나 비난을 받고 고비를 겪을 때 힘들다고 주저 앉으려 하지 않는가,


조금 힘들다고 긴 호흡을 잃은 채 조급하게 대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생은 매순간 선택을 필요로 하는 '갈림길'과 '막다른 길'의 연속이다.


루쉰이 연인인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길.


'갈림길'을 만나면,


"울지도 되돌아오지도 않고 먼저 갈림길 어귀에 앉아서 좀 쉬거나


한잠 자고 나서 갈만해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계속 걷습니다",


'막다른 길'을 만나도


"같은 방법을 취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 가시덤불 속으로 헤치고 들어갑니다"


 


 


포기하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s://youtu.be/9-g3zEyBVGs?t=3760



나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썩어 빠진 것이 언어라고 생각해요, 언어, 인간의 말 그것은 타락의 극치까지 간 것이죠. 사람들이 말을 할때,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서 말을 안해요. 뒤섞어버려요,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니까.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소통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단절되는 거에요, 단절은 이미 거의 다 완성이 됐죠. 언어가 인간을 단절시켜 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참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 것이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버리는 까닭은 그 인간이 생각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는 자들은 의견을 사실처럼 말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갖고 있는 당파성을 정의라고 말해요. 정의 정의나 혹은 진리라고 말해요 나의 당파성을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시대에서는 언어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시대의 최고의 권력은 여론 조사 결과에요. 이것은 정의이고 진리에요. 이것이 가치의 척도가. 이것은 정말 무지몽매한 대상으로 가는 시작인 것이죠.  여론 조사의 결과로 정의와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론조사의 결과라는 것은 그건 의견과 사실이 뒤죽박죽이 된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그런것이 또 정의의 탈을 쓰고 있으니까.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죠. 소통이 그래서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잚은 여러분들도 참 고민을 해봐야 하는 일이죠.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나의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의 의견은 어떤 사실에 바탕한 것인지. 나의 의견은 아무 사실에 바탕하지 않고 그저 나의 욕망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를 구별하지 않고 (말을) 마구 해대니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말이 되는거죠. 그것이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국회에서 쏟아지고, 언론에서 쏟아지고,  개인 사이의 담론에 쏟아지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런 담론들이 적대하는 진영을 이루고, 적대하는 이념의 진영을 이루는 것이죠. 이런 언어의 대결 구도는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것이에요. 아주 천치같은 것입니다. 그런 현상에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것이죠. 나는 이것이 가장 우리 세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젊은 여러분들도 그 시대에 매몰되어 있는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붕괴할 시기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여성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나중에 신플라톤 학파의 비조로 불리는 철학자 히파티아였다. 그녀는 철학자인 동시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였다. 어느 시대에서든 평생에 걸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낼 수 있는 학자라면 그는 보통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히파티아야말로 이러한 범주에 드는 인물로서 3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뭇 남성의 구혼을 모두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미 멸명의 그림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노예 제도가 고대 문명의 생기를 완전히 죽여 놓은 상태였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막강한 이 세력들의 진앙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에서 과학을 아는 생물 종은 인간밖에 없다. 지구에서 벌어진 생명 진화의 긴 역사에서 아직까지 과학하기는 전적으로 인류만의 것이다. 인류의 과학하기 능력은 자연 선택의 과정을 거쳐 대뇌 피질에 새겨진 진화의 산물이다. 과학이 진화 과정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과학하기가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학하기는 아직 완벽하지 못하므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과학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과학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줄 안다는 것이 하나의 특성이다. 또한 모든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그리고 과학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단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는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생각됐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제한된 상황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각국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더 넓고 큰 맥락에서는 목적을 공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고 큰 문제인 것이다. p.5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