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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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릴러는 'A.J.핀'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다. 저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당황할 필요 없다. <우먼 인 윈도>는 그녀의 데뷔작이기 때문이다. 소설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단숨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다니. 그녀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장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우먼 인 윈도>는 정말 단숨에 읽을 수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가 말 그대로 소름 끼치게 한다. 첫번째 반전을 접한 후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반전이 등장한다. 만약 내가 이 글에서 어느 정도 스포를 한다고 해도, 어디선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읽었다고 해도, 그걸로 <우먼 인 윈도>를 다 알았다고 하면 착각이다. 끝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에게 기립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읽는 것이 굉장히 느린 편인데, 일상에 치이지만 않았다면 아마 하루만에 다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책은 <랑야방>이라는 중국 무협 소설을 제외하고는 아마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무협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내게 '아, 이래서 아버지께서 그렇게 책방에다 무협소설을 빌려다 읽으셨구나.'라는 깨우침을 주었던 책이다).

주인공인 '애나 폭스'는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집 밖으로 정말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그녀는 보통의 나날을 사는 대신, 카메라로 창 밖의 동네 사람들을 관찰한다. 사회생활을 렌즈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정신과 의사라는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환자의 치료와 안녕을 증진시킬 것입니다.

나 개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겠습니다."

P218

의사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줄줄 읊는 '애나 폭스'가 건너편 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하고서, 집 밖을 나서는 '공포'보다 타인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녀가 정신병을 가졌다는 데 있다.

"아니, 확신해. 확신할 수 있어. 나는 망상을 늘어놓는 게 아니야."

P355

집 밖으로 전혀 나오지도 않고, 심각한 알콜 중독과 정신병 약 복용은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경찰들은 모든 증거와 증언이 그녀가 조작한 것이며, 망상일 것이라고 여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성적인 경찰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왜, 왜, 전혀 믿어주질 않는건데!!!!!!"하며 답답함에 몸부림쳐야 했다. '애나'가 겪은 일을 나도 글 밖에서 함께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먼 인 윈도>, 창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삶을 영위해나가는 여자를 통해 우리에게 진실을 볼 것을 주문한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로서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할 만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진 정신적인 문제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을 볼 기회를 포기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이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지나치게 믿고 있으며, 진실을 마주할 기회들을 아주 쉽게 포기해버린다는 것을, '애나'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다.

"이메일 주소도 없다고 했다. 페이스북 계정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P408

SNS계정이 없고, 온라인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치부된다고 지적하는 점이, <우먼 인 윈도>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집 안에 갇혀있는 정신과 의사는 여러 아이들을 도왔고, 그들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했지만, 이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며, 아무도(!)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빛으로 이끌려고 나서지 않는다. 남들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온라인 계정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건너편 집 아들 '이선'은 아이디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과 연결되질 못한다(뭐, 여러 이유가 존재하지만 스포하지 않기 위해 다른 건 배척하겠다). 하나의 존재가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저자가 소설을 통해 일깨워주는 또다른 점이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수많은 존재들이 눈길을 받지 못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릴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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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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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담장을 홀로 걷는다."

 

저자인 이규연 국장은 '탐사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이 가진 세상이 뒤집히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과, 때로는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정부와 맞서 싸우며 일해야 하기에, 교도소 담장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언제 안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항상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규연 국장은 외롭고, 위태로운 '탐사 저널리스트'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으며, 근 30년을 언론인으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의 방대한 역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30년간 탐사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마주한 사건의 기록이자 치열한 반성이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30여 건의 사건과 그만큼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작은 현대사'로 봐도 무방하다.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이면을 담으려 노력했다(13p)"라는 프롤로그만 보더라도, 그의 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지난 <따뜻한 냉정>이라는 '박주경' 앵커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도 느낀 바이지만, 언론인들의 글을 읽는 게 흥미로운 것은 여러 시사 이슈가 다뤄지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도 사회상을 읽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나는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더 인상 깊게 읽었다. 어떤 사건들이 있었다는 걸 일깨워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규연 국장과 여러 기자들, '스포트라이트'팀 등은 집요하게 그것을 파고들었다. '탐사 보도'의 특성상 사건 하나를 표면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심층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밝혀내는 일이 중요한 탓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언론인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기에 시간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사건을 파악하는 일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국정 농단 사건'이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과거의 일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해,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식이다.

가끔은 책을 읽으면서 이 분도 그저 사람들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낼 만한 소재를 좇는 기자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앞으로 태풍으로 태풍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금의 날갯짓은 과연 무엇일까(58p)" 같은 대사들은 기자로서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시선에서 글을 읽을 때는 자신의 고통이 가십거리로 치환된다는 것이 가슴 아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기자들이 끝까지 사건을 파내어 이슈로 떠올려 준 덕분에 이목을 끌고, 그 덕분에 사건이 해결되는 때도 있으니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읽으면서 지난 1일에 '몸과 마음의 양식당'에서 진행된 북토크를 떠올렸다. 이규연 국장이 진행하는 강연에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PD, 작가, 기자분들이 참석하셨다. 그날 강연을 들으면서 한국의 '스포트라이트'팀이 보이는 열정과 그들의 노고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책도, 방송도 '이규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 속에 진실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는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담겼을까. 책에서도 더 많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름이 담겨있다. 그들의 이름에 주목하기 위해 나도 나름의 노력을 했다.

책을 덮은 후 우리가 때로는 분노에 차서 원망할 사람이 필요해 '기레기'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그 이름들을 떠올려 보았다. 8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격동의 시기에, 혹은 내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국정 농단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들에 그들이 무슨 명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실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두어야겠다.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읽으면서 기자들의 본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제보자들을 보며, 나라면 저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당연하게 해본다. 검찰의 부정적인 면을 타파하기 위해 나서고 있는 '임정은 검사'의 말은 이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긴 한데, 함께 행동해주지 않으면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적어도 사건이 됐을 때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피해자는 혼자 죽어요.(43p)"

 

기자들에게 너희들의 본분을 다하라, 고 질책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내 곁에 놓인 피해자를 두둔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의 밑바닥을 보면서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눈 감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기자들의 의무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주변 사람들을 억울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막는 일에 우리가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훗날에 당신은 그때, 그 현장에서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230p)"

이규연 국장이 기자로서,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다. 이 구절은 비단 기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할 때 그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에게 외치는 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파헤친 진실의 구덩이들을 보니, 내가 잊어버린 것도 아예 모르던 사실들도 존재했다. 사건들을 조사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기자와 같은 역할은 내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의 피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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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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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는 작가 김연경이 쓴 친절한 세계 문학 안내서이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세계 문학은 거의 이 책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저자는 자신의 방식대로 책을 선정하고 분류해, 책과 배경, 또한 작가들에 대한 설명까지 달아놓았다. 각 책마다 평균 2장이 할애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놀라웠다.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세계 문학편>이 될 수 있겠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여진 세계 문학들을 읽는 일을 손에서 놓았다. 세계 문학을 떠올리면 엄청난 부담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떠오른다. 부모님께서 꼭 읽어야 한다며 없는 돈 긁어모아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보기만 해도, 왠지 모르게 절대 해결하고 싶지 않던 여름방학 숙제를 연상시켰다(어릴 때의 나는 다른 또래에 비해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빽빽한 책장에 꽂혀 있던 전집 중에 내가 읽은 책은 과연 몇 권이나 되었을까. 읽었던 책들도 그나마 생각이 제대로 나질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은, 대학교에서 전공때문에 무진장 접해야 했던 영문학 작품들에 대한 기억은 좀 더 또렷하다.

이런 나에게 <살다, 읽다, 쓰다>를 접한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와서 그 고전들을 다 접하기에도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일에 비한다면, 짧은 요약서는 부족하겠지만, 김연경 작가가 쓴 책만 읽더라도 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소위 말하는 '아는 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책 자체뿐만이 아니라, 저자가 언급하는 배경이나 작가들 이야기도 한 권의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계적인 고전들은 앞 세대에 쓰여졌고, 한국을 벗어나 다른 장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 완벽하게 깊이 읽기가 쉽지 않다. 배경이나 작가의 개인사까지 알아야 무슨 책이든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몇 번이나 우리가 직시하고 있는 현실을 책에다 옮겨놓은 작가들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이 책은 세계 고전 문학을 영원히 읽지 않을(!) 이들에게도 간편하게 지식을 심는 데 유익하겠지만, 앞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해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고전을 분명 읽기는 했으나 <살다, 읽다, 쓰다>를 읽고서야 비로소 '아!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담, 작가가 서문에 쓴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9p)"라는 글귀에 처음에는 어찌나 반항심이 일던지.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깊이 문학을 탐구하고, 작가와 그 배경에 관심을 가지는 공부가 꽤 즐거웠다. '모범생'이라는 단어에 또 뜻모를 청개구리 심보가 생겨났지만, 이런 모범생이라면 기꺼이 되고 싶다. 다른 데서는 몰라도, 이 책을 읽다보면 누구든 문학 모범생이 되고, 그 일을 기꺼이 즐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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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던 나날
리디아 유크나비치 지음, 임슬애 옮김 / 든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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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작가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회고록이다.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TED 강연 <부적응자로 사는 삶의 아름다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책 <숨을 참던 나날>에는 '리디아'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책에는 그녀가 느꼈던 모든 것들이 거의 가감 없이 적혀 있다. '거의'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은 것은 작가가 책에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제외한 내용이 존재한다, 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욕을 남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전에 저질렀던 범법행위들, 개인적으로 가진 아픔들까지 전부 만나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모든 걸 털어내도 되는 거야?라는 걱정이 책을 읽는 내내 수도 없이 들었다. 저자가 이렇게까지 쏟아낸 목적이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난다. 마지막 장을 읽고 정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도 안다. 내가 엮어놓은 인생 이야기가 때로 얼마나 분노로 가득하고 자기 파괴적이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망상같이 읽히는지. 그렇지만 아름다운 것들. 우아한 것들. 희망찬 것들은 때때로 어두운 곳에서 생겨난다. 게다가, 나 같은 여자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내 목적이니까(410p)".

그렇다. 그녀는 '숨을 참던 날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을 찾고, 삶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을 세세하게 서술하며, 상처 입은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과거 그녀의 행적을 보고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이 책을 읽고 뭔가 깨우침을 얻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경외심에 이 부분만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작가 '리디아 유크나비치'가 회고록에서 보여준 자기 파괴의 원인은 부모였다. "우리 집의 모든 방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48p)", "아버지의 분노, 그의 존재가 마음대로 내 목소리와 손에, 내 살결에 침입했다(71p)". 두 구절만 보더라도, '리디아'가 아버지에게서 얼마나 억압받았고, 그것을 떨쳐내고 싶어 했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분노하고, 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일에 치이며 살았고, 알코올 중독으로 허덕이며 자식들을 아버지에게서 구해내지 못했다. '리디아'와 그녀가 신처럼 존경하던 언니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우리가 웃은 웃음은, 마침내 자신의 뿌리에서 해방된 여자들의 웃음이었다(396p)".

가장 안정감을 느끼며 지내야 할 가족이라는 둥지에서 떠나갈 생각만 하던 '리디아'는 놀랍게도 "당신은 당신만의 가족을 꾸려야 한다(408p)"고 설파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술과 마약을 즐기며 살던 '리디아'는 현재의 남편과 아들을 만나 평생 모르고 살 줄 알았던 인생의 희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속에 이 두 사람, 아이와 남편과 함께 있자니. 숨쉬기도 벅차다. 전에는 몰랐다. 이것은 가족이다. 나의 가족이다(380p)."

좀 뻔한 말이면서도, 내 마음을 건드렸던 건 '리디아'가 한 말-어머니와 아버지, 자식으로 이루어진 이성애적 삼위일체는 그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이었다. 꼭 어머니, 아버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꾸릴 필요 없이, 마음이 맞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어내라,는 소리는 생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사람 정말 뭘 좀 아는 사람이잖아?'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부분이다. 진짜를 가려낼 줄 아는 어른을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가족들 이외에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277p)". 그녀도 인정하는 점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 외에 무엇이 존재했거나 존재하든, 글쓰기가 지금 내 옆에 있다(283p)". 이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글쓰기'도 그녀를 살려 놓았다.

일명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잘 알려진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영화 판권을 구입해 제작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책을 덮고 나서 드는 생각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배우가 아니라면, 이 책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보여주던 그 매혹적인 우울함을 떠올리면 작품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국내에도 개봉하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개봉하게 된다면 보게 될 것 같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던 슬픔을 견딘 사람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자신과 같은 이들을 붙잡아주고자 한다. 그러니 당신이 가진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 주저 없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안으로 들어오기를.

이 물이 당신을 잡아줄 것이다.


당신이 인생을 제대로 조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모두를 관통해 흐르는 거대한 슬픔의 강이 당신에게도 닿은 적 있다면, 이 책을 당신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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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
우종학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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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며, 거대 블랙홀과 은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우선 나는 엄청난 과학 무지렁이라는 점을 밝혀야겠다. 소위 말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1학년때 공통으로 배운 과학 과목이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밝혀내는 사실들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블랙홀 강의>를 읽으면서 자꾸만 개념들을 잊어버려 몇 번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야만 했다. '음, 그렇구나!' 하며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책장을 넘겼는데, 후에 '그게 뭐였더라?'하면서 아무리 애써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보니까 뒤로 갈수록 '블랙홀'에 관련한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니까 "과학이 어렵다며 지레 겁을 먹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블랙홀이 주는 풍성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p6)"라는 저자의 말처럼 나와 관련이 없는 지식이니 알 필요가 없다며 외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블랙홀'을 나의 우주에 채워넣기로 했다. 무엇이든 배워 놓으면 다 쓸모가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신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8장을 통틀어 '블랙홀'이라는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 때가 한 번도 없었다. '블랙홀'에 관련된 것들을 총 망라해놓았다고 보면 된다. '블랙홀'에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책 속에서 줄곧 최대한 쉽게 자신의 관심사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책은 금방 끝이 난다. <블랙홀 강의>는 강의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 혹시 천체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학교 때 교양 수업을 듣던 기분을 떠올리며 읽어보면 좋겠다.

참고문헌을 제외하고 362p에 달하는 이 책에는 블랙홀의 역사와 기원뿐만이 아니라, 별과 은하에 대한 설명도 자연스레 덧붙여져 있다. 전공하는 학생들 이외에 대중에게도 블랙홀을 알려온 우종학 교수는 블랙홀과 관련해 자주 듣는 질문들을 책에 싣기도 했다. 마지막 장인 8장에서는 우주를 탐구하는 망원경과 관측시설들에 대한 소개도 이어진다.

과학을 연구하며 "새로운 지식을 성취한 기쁨을 누리는 바로 그 순간, 더 큰 미지의 영역이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며", "새로운 지적 지평선이 선명히 드러(41p)"난다고 한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일 자체가 고되지만, '천체물리학'은 특히나 실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라고 한다. 광할한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블랙홀은 빛늘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관측을 통한 검증이 쉽지 않(105p)"기 때문에, 천체물리학을 전공하고 블랙홀을 연구주제로 삼고 있는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무한한 영감의 세계인 우주에서 그 무엇보다도 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지성의 한계까지 우리를 내모는 대상(30p)"인 블랙홀은 "너무나 기괴한 존재"였기에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에게 거부당하고 외면받"기도 했다. 다행히도 21세기의 과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고, 첨단 시설을 이용해 연구하고 있다. <블랙홀 강의>에서 우종학 교수가 들려주는 블랙홀 연구의 역사를 들었기에 더욱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수없이 부정당하던 블랙홀은 여러 훌륭한 과학자들의 손을 거쳐, 현재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까지 이어졌다.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들을 발견해내는 과학자들의 상상력과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그들의 끈기와 노력을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버티고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과학자들은 '괴짜'라고 불리며, 얼마나 많은 무시를 당해야 했을까?

저자가 블랙홀에 관해 책 안에 탈탈 털어놓은 지식도 정말 유익했지만, 나는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질문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과학자가 된 것도 어린 시절 번개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때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답을 해준 선생님 덕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또한 과학이든 어느 것에 관한 질문이든 "그게 밥 먹여주니"라는 대꾸는 흔하게 들어왔던 듯 하다. 블랙홀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 많은 신비를 우리가 알아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논리만 따지지 않고,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 혹은 과학자들이 세상에 내놓는 이론이나 사실들에 관심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 블랙홀을 그저 검은 큰 구멍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퀘이사', '사건지평선', '제트'등 따위를 알려준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를 전한다. 이 지식이 밥을 먹여줄 일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책 <블랙홀 강의>는 지구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우주를 보게 해주었으며, 온갖 과학 괴담에 시달리지 않고 세상을 직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와 만나기 전까지 그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눈을 마주하고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의 우주에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블랙홀도 여러분의 우주에 아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동안 쌓아 온 자료를 깡그리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길이 막힐 때마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창의성은 노력에 비례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사에 빛나는 위대한 업적들은 그렇게 긴 산고를 거쳤습니다. - P41

과학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한 과학지식이 아니라 그 과학지식을 가능하게 한 위대한 과학자들의 상상력입니다. - P71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긴 장마 기간에도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요. 단지 구름에 가려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P72

여러분 몸을 구성하는 탄소나 산소 원자 하나하나가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인간들은 별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보호하고 보존한다면 아마도 인류는 별에게 진 빚을 충분히 갚는 셈이 될 겁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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