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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응당 무언가에 대항해야 한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명확하게 규명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으로부터 문학의 가치가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져야 했고, 현실의 궤도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가볍게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발생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사건들을 종이 위에 몽땅 쏟아냈는데, 처음엔 물론 의구심을 가지고 읽지만 나중에는 작품이 가진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아져 버렸다. 이토록 무해한 귀여움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어 무얼하나, 싶도록 그들은 살면서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다.
정세랑 작가는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밝은 환상의 세계를 조성한다. 이번에 읽은 <보건교사 안은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정말 이런 식상한 문구를 문장 사이에 끼워 넣고 싶을 정도로) 맑은 사람들이 한가득 선물처럼 담겨 있었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할한다면 우리는 이곳의 밝음을 모두 ‘정세랑 월드’의 캐릭터들에게 빚지고 있을 것이다. ‘인표’에게 ‘은영’이 수면등에 비유될 수 있는 것처럼 내게는 그들 모두가 그랬다. 이렇게 지칠 줄 모르고 빛나는 작품을 계속해서 뽑아내는 정세랑 작가 덕분에 나는 여전히 인간성을 믿고 내가 사는 세상을 지지한다. 소설 속의 세계에 불과하고 언젠가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보건교사 안은영> 속 모든 이들에게 애틋함을 품어 버린다. 굴곡진 삶 속에서도 온통 다른 삶을 구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은영’과 삐걱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힘차게 뛰어다니는 ‘인표’의 손을 마주잡고 싶다.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아이들의 눈 안에서 번뜩이는 빛을 지켜줄 수 있을까.

“즐겁게 쓴 이야기라 영원히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또 이어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277쪽)”

독자로서도 삶의 부정적인 에너지 전부로부터 분리되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좋은 작품이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다시 또 이어진다면 좋겠다. 내가 사는 세상이 미워 보일만큼 강력하게 아름다운 환상이 그때 또다시 펼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주인공과 악의 없이 선생님을 따르며 오리를 아끼는 순수함으로 훌쩍이는 아이들이 가득한 곳, 나는 주저 없이 또 정세랑 월드를 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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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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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토록 제목에 충실한 작품집을 본 일이 없다.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각각의 작품 속에서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탐구했다. 이 책은 집요하게 단어들을 골라내고 또 그것들을 엮는 과정 속에서 아주 가뿐하게 내가 알던 현실을 뛰어넘으면서도,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소설 속 세상이 나의 바로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으리란 인상을 주었다. 두려움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세계를 배신하기란 어렵다. 내가 지하철에 서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로 나는 그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언제나처럼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애초부터 내게 낭만을 꿈꿀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광적인 집착이 놓여있다. 순수하고 단순한 로맨스 서사는 싫증이 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본래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광기가 섞여들면 독자가 벌써 진절머리를 내며 도망쳤어야 옳다. 하지만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거기에 나 자신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광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는 그들의 욕심이 나의 것과 흡사했으므로 달아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질에 대한 갈증과 더 많이 가지려는 고질적인 습성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놓인 독자 전부에게 귀속된다. “그때라도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209쪽, 「천연 꿀」)” 그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딱 한 번의 실수로 삶의 구렁에 빠지게 될 가능성을 인간인 우리는 모두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이 설득력 있게 들리고, 미친 짓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문장에 들러붙게 된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의 광적인 집착만을 파헤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광견병에 걸린 개가 되어 미친 듯이 사람들에게 쫓겨 다닌다. 죽음 이후에도 ‘코카인’을 울부짖는 사람과 광기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한 개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광견병에 걸린 개」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지워버리고 인간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그들의 광기가 일상적인 것에 단지 한 발 더 나아갔을 뿐이라는 사실을 되짚어본다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시작에 사랑이 있었다면 그 끝인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적절한 때에 집착적인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이들의 죽음은 비참하다. 짐승과 같은 본능적이고 성급한 갈망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은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극적인 죽음임이 분명한데도 감정 과잉을 이끌어내는 일은 없다. 여전히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일상적인 과정이란 인식이 더욱 생생해질 뿐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우리는 “이미 내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최면상태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92쪽,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인다. 삶을 향해 애를 쓰다가 진이 빠지면 우리는 타고 있던 배에서 바다라는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수많은 죽음을 겪어야만 했던 작가 본인의 경험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그녀를 찾아갈 겁니다.(290쪽, 「음울한 눈동자」)”

광기와 사랑이 뒤섞인 세상 속에서, 또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될 삶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해야 한다. 나는 작가의 ‘음울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거리를 잴 수 없는 죽음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삶을 향한 애씀이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권위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난한 인생 속에서 글쓰기를 붙들었을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강인한 생명력을 떠올릴 때면 숱한 아이러니로 가득찬 지금을 견뎌내야 한다고, 그 안에서 무언가라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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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라지지 않는 여름 1~2 - 전2권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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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사랑에 관해 다룬 작품이라면, 이전에도 수없이 보았다.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특별한 건 그들의 과거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캐머런 포스트'의 인생을 다루면서 애초에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시도를 통해 동성애가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끌림이며, 타인의 억압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님을 드러낸다.

사실 <사라지지 않는 여름>에서 '동성애'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저자는 아이의 성장 과정 속에서 어른들이 맡은 역할에 주목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교육자이자 조력자로 여겨지지만,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이가 가진 성질 중 스스로의 신념에 반하는 종류의 것이 존재하면, 이를 억압하고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종용할 때도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이 동성애였으나, 이외의 어느 특질이든 보호자의 불만족으로 짓눌리고, 강압적인 변화의 길목에 놓일 수 있다. '캐머런 포스트'의 주변 어른들처럼 자신의 의견만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들은 하나님과 종교를 핑계 삼아 자신의 논리를 공고히 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성찰과 개선은 엿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오류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배제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타인만이 교육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무결한 어른이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러니 단호하게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려 들기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약함을 드러내며 위로를 받고, 솔직하게 아이와 상의할 수 있는 태도가 교육자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세상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부정한 욕망과 행동으로 인한 고통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고통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p55)"

캐머런을 교육하던 '릭'과 '리디아'는 "동성 매력 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캐머런은 이들을 비롯한 여러 어른들에게서 '정상'적인 상태와 '원래대로' 되돌아오기를 강요받았다. 그녀를 "정상으로 만든다"라는 문장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더욱 충격적인 발언은 동성애의 반대말이 이성애가 아닌 거룩함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을 정상과 비정상의 흑백 논리로 구분 짓는 어른들의 태도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정상과 원래의 기준은 태초에 누가 설정했을까. 만약 퀴어가 대다수인 공동체에서 태어났다면, 정상과 비정상의 대상은 뒤바뀐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옳을 수 없고,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신념만이 전부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다수가 지정한 정상성이 진짜로 올바른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수없이 개선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할 지점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온갖 것을 수용할 자세를 지니지 않고, 내가 믿는 정상성만을 지켜내기에는 세상이 이미 너무도 복잡다단해졌다. '동성애'를 비롯한 수많은 변화가 눈앞에 쌓여있고, 나와 다르고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라는 이유로 전부 내칠 수는 없다. 또한, 동성애는 인종 차별만큼이나 내가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문제에 포함되지 말았어야 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박해받고, 죽어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 사건은 바로 저였어요. 그냥 저요. 언제나 그렇죠. 제가 이 모습 그대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p158)"

소설 속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교육기관에서 캐머런과 함께 지내던 '마크'가 했던 말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타인이 품은 혐오의 근원이라는 인식은 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워 보였다. 물론, 죽음 만으로 상대의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나이대와 상관없이 모두를 아프게 할 것이다. 마크를 비롯한 '하나님의 약속'에 격리된 아이들 전부 어른의 오만이 아니었다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얄팍한 믿음으로 어른들은 거만해졌고, 아이들을 자기혐오의 세상으로 내몰았다. 이번 생이 처음인 어른들도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차츰 성장해간다. 아이들을 가르칠 완전한 자격을 가진 이는 없고, 우리는 그저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도모해 나가는 협력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소설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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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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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신>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떠올린 건 '계급 투쟁'의 이미지였다. 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비극을 담았으리란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의 지역적 출신, 즉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독일로 도망쳐 와 이민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해 묘사한 작품이다. 현 시국에서 지역적 출신을 논하는 것이 나는 옳은 일로 느껴진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아시아인은 '출신'을 이유로 코로나19 감염자로 여겨져 차별받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종차별 문제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에 '출신'을 근거로 한 차별과 아픔을 담은 소설 <출신>을 읽는다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유럽이나 미주 지역을 여행한 적도 없고, 국내에서도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자라왔으므로 출신이 민감한 이슈로 떠오를 이유가 없었다. 타인의 경험이나 의견이라면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받았으나, 역시 나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기란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인 경험을 읽어내는 건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겉으로만 난민과 이민자의 인권을 옹호하지 않고, 그들과 깊이 공명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타국에서 지낸다는 게 어떤 일인지는 나로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일이 틀어졌을 때 도망칠 만한 안정적인 기반이 존재했다. 전쟁으로 떠밀려와 어떻게든 타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저자의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황을 판단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언어와 문화에 관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이전 국가에서의 노력은 존중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국인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잠시 동안 생존을 보장받더라도,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생활은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향은 보스니아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돌아간다면 정신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설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탈출했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되짚는다. 그렇게 황망히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오면서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깃든 공간과 그곳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털어놓는다. 따라서 떨쳐내려고만 했던 과거와 제대로 마주하고,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필연적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소설 쓰기라는 명분을 통해 그럴 기회를 획득한다.

출신을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도로 완전해진다.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역사가 존속될 것이다. 저자는 공간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꺼내 놓는 것으로 고향을 내팽개쳤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스스로도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면서 갖은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자신만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은 사샤 스타니시치를 꽤 괴롭혔던 듯하다.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고향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자 오래된 친구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 지구촌이라는 관념이 등장한지 무척 오래되었음에도, 지역적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출신'을 근거로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멸시받는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들은 출신적 차이에서 어떤 실존적 위협을 느끼고 있을까. 한국에도 출신이라는 경계가 아직도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인종차별에서 아시아인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역적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포용해 왔던가,라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역적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사샤 스타니시치의 <출신>을 읽어야 한다.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을 둘러싸고 마침내 민족 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 P133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차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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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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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온갖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전 작 <작은 것들의 신>이 97년도에 출간되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인도에 관한 편견이 작품에 도달하는 일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하는 그곳은 너무 혼란스럽고, 불쾌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가본 적도 없는 장소를 멋대로 규정하고,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수한 매력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만큼 성장했다. 이런 깨달음은 중국에서 잠깐의 교환학생 생활로 얻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인도에 대해 그랬듯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비하했다. 두려움을 안고 내가 진짜 그곳으로 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고유의 매력으로 빛났고, 외국인인 나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한국과 달리 타인의 시선에 덜 신경을 써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나는 찰나의 경험을 통해 쓸데없는 편견을 버릴 수 있었고, 오늘 <지복의 성자>가 보여주려는 인도의 불완전한 면을 어떤 과장도 없이 직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룬다티 로이가 보여준 인도는 한국의 과거와 닮아있다. 사람들을 감금시키고, 고문하는 '시라즈 영화관'의 존재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는 건, 한국이 가진 아픔을 찬찬히 훑어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바쳐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 세계에 놓인 고립된 자들을 이젠 외면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트랜스젠더다. 그가 가진 '여성'이라는 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끌림과 어떤 열의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숱하게 약자의 위치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도 <이제야 언니에게>,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견뎌야만 하는 차별과 폭력을 토로했다. 인도는 한국보다도 더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국가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자살하는 여성 중 약 40%가 인도인이라는 보고까지 있다(주요 원인으로 조혼과 가정폭력이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분쟁과 내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은 종종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담하도록 요구되는 탓이다. 그들은 이유 없이 잠재적인 혁명가로 분류되어 처단당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이 처한 우월성을 짚어내면서도, 아룬다티 로이는 여전히 피해자에 속하는 여성의 서사를 다룬다. 가난한 부모에 의해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고, 어김없이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문장 앞에, 어떤 행위가 삽입되더라도 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무덤 가까이 가는 게, (한국에서는 흔히) 제사를 지내는 게. 여자들은 특별한 근거 없이 여러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한편으로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안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엄마'의 자격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신체적인 문제로 '안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안줌'의 반대편에 나름의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립적인 두 집단을 통해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엄마'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충만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번 소설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특히 카슈미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과 학살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러 캐릭터와 서사는 인도의 불온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안줌'은 세상의 변두리에 서서 낮은 시선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의 삶을 관찰한다. 또,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라는 캐릭터의 글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정점에 달한다. 인도의 잘잘못을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오랜 다툼 속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복의 성자>를 탄생시켰다. 계급 간의 끔찍한 차별과 종교적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은 그러나, 사회적 갈등과 역사적 관점에서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봐도, 우리는 그저 시험을 위한 역사만을 다뤄왔을 뿐, 모든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지 못했다. 때로는 무고한 생명의 죽음에도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저자는 인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이에게 숙고하고 반성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그가 찍힌 사진의 저작권 싸움을 더 오래도록 기억했다.

TV 카메라와 미디어는 선택적이고, 편집된 보도로 무자비한 전쟁에 가담했다. 억울한 이들의 고립된 슬픔을 외면하고, 대중이 냉소적이 되도록 부추겼다. 올바른 질서 확립을 위해 나서고, 국민의 편에 서야 할 정부와 경찰은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온갖 피해자의 요구와 꿈을 묵살한다. 이처럼 모두가 무관심할 때, 미디어의 기록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공권력을 고발하고, 대중의 관심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흥망성쇠에 있어 언론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지복의 성자>는 슬픔으로 시작해 절정으로 치닫다가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배제되고 차별받은 사람들끼리 결합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스 우다야 제빈'이라는 미래 세대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외로운 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인도를 자멸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포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도뿐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에도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더 큰 '아자디(자유)'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겠다.

▶연관 작품

<남산의 부장들> w.김충식, 폴리티쿠스 출판(주지하다시피 동명의 영화가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 w.수전 손택, 이후 출판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 P355

카슈미르는 피부가 흰 사람들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런 뒤바뀜이 끔찍한 비방에 일종의 정당성을 불어 넣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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