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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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세대'에 관한 글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대부분의 작품이 청년 세대에게만 집중했다. 기성세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간극을 문제 삼으면서도, 그 원인을 분석하는 글은 드물었다. 이 때문에 기성세대와 밀레니엄 세대 양쪽의 의견을 모두 다루고, '세대'라는 단어 자체를 해체하려는 인문 잡지 '한편'이 반가웠다. 여기에 실린 10편의 글은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들며 세대와 청년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이전과 달리 한국을 넘어서서 베트남과 중국의 청년 문화를 두루 살피려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청년을 수동적인 약자의 위치에만 고정시키지 않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의제를 주목한다. 청년 세대의 중심에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있음을 발견하고, '페미니즘 세대'로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박동수, <페미니즘 세대 선언>). 88만 원, 3포 세대 등의 이름으로 항상 무언가를 포기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있던 청년들은 비로소 고유의 특질을 획득한다.

청년 세대가 페미니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려는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반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청년들은 세상이 지나치게 여성의 편을 든다고 비난한다. 보통의 경우 이는 공적 결정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생각하는 남성이 반페미니즘을 내세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무리 가운데 같은 여성도 적지 않다. 또한 괜히 나섰다가 기존의 권리마저 축소될 상황을 우려하는 여성도 존재한다. 약간의 진보가 여성에게 모든 걸 제공해 주었다고 여기는 젊은 남성과 같은 여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럽다. 그것이 나와 비슷한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슬픔은 극대화된다. 하지만 사람은 본래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개인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그들을 혐오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여성 인권 향상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나아가는 이들도 전부 같은 방식으로 저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각각이 존중받고, 때로는 협의를 통해 더 나은 지점을 발견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청년'이라는 키워드의 부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김선기, <청년팔이의 시대>). '지역주의'를 대신해 '세대'나 '청년'이 정치적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 내의 차이를 묵살하고, '청년'을 강조하다 보면 불평등이 강화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청년을 언급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속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또한, 모든 청년이 약자로서 정치적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한 세대에서 벗어나 개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청년 세대가 정치적 이익에 활용되지 않고, 진정으로 도움이 절실한 곳에 손길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 잡지 한편:세대>는 청년 세대의 강점을 짚어내고(고유경, <세대, 기억의 공동체>), 성장을 독려하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잡지이기도 하다. 동년배뿐 아니라, 윗세대와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청년 세대의 우울함을 드러내면서도, 저항하기를 멈춘 무력한 청년들에게 영화 <벌새>의 '영지 선생님'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자청한다(이나라, <'벌새'와 성장의 딜레마>). 청년들이 기성세대에게 잠식되지 않고 발전하는 방법으로 기후 변화라는 위기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제시된다(정혜선,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경제 발전을 위한 과거의 혁명으로 야기된 문제를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후대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볼 수는 있다.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환경을 비롯한 다양한 면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 경쟁의 과열로 지치고 무기력해진 어른이 재생산되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선순환의 실마리는 상품화에 저항하는 보편 복지를 위한 세대 간 연대에 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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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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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는 이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조합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2020년이 시작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을 수 있다. 567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톰 스웨터리치가 그려낸 세계에 빨려 들었고, 꿈에서마저 소설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인류 종말을 <사라진 세계>에서 목격한 나는, 공포에 자주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섀넌 모스'의 의지에 감탄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생생하고 강렬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결합한 이 작품은 SF 소설 팬들을 넘어서서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독자의 마음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공포'는 <사라진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과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성을 잃었다. 소설 밖에서 나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을 때 침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렇게 감정에 짓눌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일데크루거'는 끔찍한 미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감정에 휘둘려 나약해진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정당화하는 일에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포를 극복해내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수사관 '섀넌 모스'와 '리브라 호'의 '레마크'를 비롯한 몇몇 선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안위를 중요시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내하려는 그들은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급박한 위기 속에서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는 결정 속에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욕심은 저만치 물러난다. 여기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개인이 당연하게 희생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까. 개인의 욕구와 도의적인 책임이 상충할 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죽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면, 세상을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작품 속 '섀넌 모스'와 '레마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섀넌과 레마크를 비롯한 선원들이 했던 희생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 인류가 미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 여행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래 세계를 탐험하는 대신 그들은 현재를 누릴 기회를 잃었다. 인류의 발전은 소수의 희생을 동력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사라진 세계>에는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달한 세상이 등장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도 부정적인 단면이 존재했다. 미래에 오히려 더 극심해진 빈부 격차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인원이 전부 '혈연'에 따라 선발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서러워지기도 했다. 인류 멸망은 내가 자초한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늘 약자라는 사실이 억울하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발달해도, 뒤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사라진 세계>는 보여준다. 현재에도 풀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과 이미 지나버린 과거. 그것들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이와 다르게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인간의 의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섀넌은 모두가 낙담하고 포기해버렸을 때에도 초심을 되새기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종말을 물리치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내는 그녀를 보면서 드라마 <도깨비> 속 대사를 떠올렸다 : '인간의 의지로 뚫지 못하는 문이 없구나(의지였는지, 절박함이었는지, 대사가 명확하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게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의 최후가 찾아와서 얼마만큼 잔인하게 세상을 뭉개버릴지 알 수 없지만, 섀넌 모스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허구에 불과하고, 곧 끝나버릴지라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금을 살아야겠다. 마치 지금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이고, 끝도 없이 영원할 것처럼.

그녀의 일생이란 1997년의 여러 상황이 만들어 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아주 작은 존재 가능성에 기댄, 마치 유령 같은 존재였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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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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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름은 정열적이고, 식물의 푸르름이 돋보이는 계절이다. <여름의 겨울>에는 아버지와 그의 분노만 없었다면, 영원히 생동감 넘치는 여름을 만끽하며 살아갔을 아이들이 있다. 패배감에 젖어 약자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일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뎌내는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가족 안에는 언제나 겨울만 존재하고, 끝을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위태로운 관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세상 밖의 계절과 관계없이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가정은 흔하게 소설의 소재가 된다. 가정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 현실 속에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다. 소설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대부분 남성에 의해서 행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름의 겨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최종 방어선의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하지만 <여름의 겨울>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어머니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버지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편을 극복하지 못할 상대로 여겨 스스로 위기에 대항할 힘을 기르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공포에 짓눌려 자신이 속한 가족과 집이라는 공간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여기는 작품 속 여성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읽은 작품들에서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묘사하므로, 어머니가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순응하게 되는 과정을 알아내고 싶었다. 어차피 평생을 남편의 그림자에 시달리게 될 테니, 물리적인 폭력을 감내할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집 밖에도 희망은 없으리라는 사실이 그녀들을 묶어두었을까.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강인한 어머니가 될 수는 없었을까. 이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면서도 조심스럽다. 나는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까, 건방지게 구는 것처럼 보일 것만 같다.

하지만 <여름의 겨울>에서 '나'가 보인 태도를 고려하면, 여성 스스로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나의 희망사항이 완전히 그릇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포식자'와 같은 태도를 때때로 내보인다. 게다가 '영 교수님'의 부인인 '야엘'의 존재는 여성 간 협력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여성은 강력한 자아를 인식하고 휘둘리지 않기를 선언함으로써, 더 나아가 여성끼리의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폭력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이 연약하지 않고, '포식자'로서의 자아도 겸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겨울>에서 피해자가 여성이었으므로, 나는 이 문단에서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모든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을 넘어서서 우리 인류는 전부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협력을 강화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여름의 겨울>에서 아이들은 가정 폭력의 위험에만 노출되지 않았다. '나'와 동생 '질'은 정신적 고통이 가해졌을 때, 적절한 위안을 얻지 못했다. 또한, 동물들의 시체가 즐비한 방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가족 간 끊어지기 쉬운 유대는 아이들이 안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돌보기엔 부모가 각자의 문제로 지나치게 바빴다. 패배감에 젖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분노에 휘둘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부모로서의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완벽한 사람만이 부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부모로서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과 안정감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겨울> 속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못된 과거에 너무 얽매이는 삶은 아니었기를 바라본다. 제3자로서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나는 먹잇감이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정말로 살아 있고 싶었다.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존재로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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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수리 집수리 - 집을 수리하고 삶을 수리하는 건축가 김재관의 집과 사람 이야기
김재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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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고치며, 마음도 고칩니다>에서 정재은 작가가 누군가에게 부탁해 지은 집에서 살아가는 입장이었다면, 그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을 테다. 딱 그 상황에 맞는 집 수리업자의 책이 마침 내게 있었다. 영화 <집 이야기>를 관람한 후 영화사에서 선물 받은 책이다. 세 작품 전부 집이라는 공간에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새겨진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존재했다. 영화 <집 이야기>에서 집을 수리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영화 리뷰 이벤트에 굳이 해당 책이 선물로 주어졌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 "낡음을 증명함으로써 아파트와의 교환 수단이 되면서 집 수리라는 말도 함께 사라져갔다". 영화 <집 이야기>에는 아버지가 머무는 아주 오래된 집이 나온다. 가족들이 모두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오래도록 한자리에 있는 아버지는 집 그 자체다. 낡음을 유지하는 사람과 낡음을 새것과 교환하지 않으려는 사람(책 <수리수리 집 수리>의 김재관 건축가)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익숙함을 애정 하는 그들이 좋았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가 빈틈없이 새 아파트와 교환되었다. 같은 동네에 오래 살았던 나도 알지 못하는 길들이 이쪽저쪽 생겼다. 밤중에 불이 빼곡히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비행 준비를 마친 우주선을 보는 것만 같다. 낮은 벽돌 담장으로 가득하던 동네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내 동네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엇비슷한 주택에 살면서 고만고만하던 친구들도 온데간데없다. 변해버린 동네를 바라보며 내뱉던 짧은 탄식은 어느 날 큰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건물이 세워지기 전 비어있는 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또 하나의 추억이 저버리는구나, 나는 이제 되짚으며 돌아올 곳이 없구나, 하면서 바라보던 순간의 상실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그래서 과거를 함부로 내다 버리지 않는 두 작품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책 <수리수리 집수리>를 읽는 건 내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도배공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 이 책에서 김재관 건축가가 집을 수리하면서 만난 인부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배공에 대한 것도 딱 한 번 초반에 등장한다. 여러 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갑고 아버지가 일하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집을 이사할 때마다 벽지에 풀을 바르는 아버지는 여러 번 보았지만, 일터에 간 기억은 거의 없다. 심부름으로 찾아가도, 주변을 맴돌면서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과묵한 편이어서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책을 읽으며 아버지가 일하고, 또 다른 업자와 협력하는 모습을 얼추 그려볼 수 있었다. 영화나 책을 통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헤아리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김재관 건축가의 묘사처럼 인부들은 대개의 경우 배움이 짧다. 또 경력이 오래된 탓에 실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컨트롤하기가 어렵다. 일만 잘하면, 현장에서 이런 단점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한 우물만 판 덕에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고, 현장의 다른 업무도 조금씩은 할 줄 안다. 우리 아버지도 집의 간단한 수리나 보수 일은 직접 해결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집에 문제가 터졌을 때, 친구들이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아저씨'를 부른다고 해서 당황한 적도 있다. 갑작스러운 고장도 상관없고, 적지 않은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나는 나이가 좀 들어서야 알아차렸다.

<수리수리 집수리>를 통해 집은 사람의 역사가 담긴다는 말을 절감했다. '사람'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김재관 건축가와 같은 집 수리업자와 인부들, 근처 주민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집에 머무르고, 매만지면서, 혹은 공간을 두고 싸움을 벌이면서 각자만의 역사를 기록해 두었다. 나는 지금 사는 이곳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집이 가진 과거와 또 전혀 다른 모습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해본다.

 

집수리에서 기존의 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새로운 쓸모‘를 찾는 실용적 행위이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법적 해결이기도 하다. 단순히 미학적 필요에 따라 낡은 것과 새것의 물성을 대비시키려는 건축적 수법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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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고치며 마음도 고칩니다 - 우울을 벗어나 온전히 나를 만난 시간
정재은 지음 / 앤의서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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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주거지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천청 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생각하면 자가 마련은 언감생심이다. 이 책을 쓴 정재은 작가도 운명 같은 한 집을 만나지 않았다면,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삶을 지속해야 했으리라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무너져가던 집을 사들여 그 위에 새로운 빨간 대문의 집을 짓고, 남편, 그리고 강아지 봄이와 함께 또 다른 집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무지한 상태에서 집을 지어 겪어야만 했던 불편함부터 내부를 조금씩 수리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오롯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치유하는 경험을 했다. 성격 등이나 개인적인 면에서 나와 닮아있는 작가여서 그녀가 '자기만의 집'을 짓고, 또 그로 인해 현재 이 공간의 중요성을 깨닫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나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감각은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을 쓴 최은영 작가 이후로 오랜만이다. 통하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저자가 하는 말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어려웠다. 당장 일어나서 방치해뒀던 집의 구석구석을 나름대로 고치고 싶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책은 좋은 친구이고, 그와 "즐겁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깨달음과 느낌을 공유한 뒤 반갑게 헤어진다. 그 만남을 일일이 진열할 필요는 없다"라는 문장에 감탄한 후 어렵사리 조금이나마 책장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오래된 종이나 책들을 정리하면서 어쩐지 이 행위가 하나의 선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이젠 변화를 향해 나가보겠다,라는 외침처럼 들렸다.

작가는 이 책에서 종종 '가난'이라는 단어를 꺼내놓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야기하기도 하는 가난은 그녀를 오래도록 괴롭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핍된 현실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풍성하게 삶을 꾸려나간다. 저자는 자신만의 속도로, 타인에게 과시하기보다 '나'를 중시하며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삶의 본질을 보게 만든 깨달음은 집을 짓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을 건설하면서 자아를 재구축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집을 통해 절망을 이겨내고, 다시 한번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여행을 하며 떠돌아다닐 땐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태양을 찾아내고, 새로운 세계와 처음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이 책은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을 예찬한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은 열망을 증폭시킨다. 또한 저자처럼 새로이 지어낸 공간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간을 새삼 다시 보게 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음을 일깨운다.

<집을 고치며 마음도 고칩니다>라는 책은 무척 잔잔하게 흘러간다. 이토록 고요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사소한 행복을 안기고, 미묘하게 나를 바꾸어 놓았다. 현실을 재인식하고, 자신으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리 먼 길을 떠나도, 자신이 가진 집이라는 공간만큼 편안한 여행지는 없음을 책을 통해 배운다.

 

집을 지어보는 일은, 집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은,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 P32

봄은 그저 겨울만을 이겨낸 계절이 아니라 지난해를 온전히 지나서야 다시 만나게 되는 삶 같았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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