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작가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는 이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조합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2020년이 시작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을 수 있다. 567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톰 스웨터리치가 그려낸 세계에 빨려 들었고, 꿈에서마저 소설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인류 종말을 <사라진 세계>에서 목격한 나는, 공포에 자주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섀넌 모스'의 의지에 감탄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생생하고 강렬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결합한 이 작품은 SF 소설 팬들을 넘어서서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독자의 마음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공포'는 <사라진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과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성을 잃었다. 소설 밖에서 나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을 때 침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렇게 감정에 짓눌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일데크루거'는 끔찍한 미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감정에 휘둘려 나약해진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정당화하는 일에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포를 극복해내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수사관 '섀넌 모스'와 '리브라 호'의 '레마크'를 비롯한 몇몇 선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안위를 중요시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내하려는 그들은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급박한 위기 속에서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는 결정 속에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욕심은 저만치 물러난다. 여기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개인이 당연하게 희생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까. 개인의 욕구와 도의적인 책임이 상충할 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죽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면, 세상을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작품 속 '섀넌 모스'와 '레마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섀넌과 레마크를 비롯한 선원들이 했던 희생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 인류가 미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 여행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래 세계를 탐험하는 대신 그들은 현재를 누릴 기회를 잃었다. 인류의 발전은 소수의 희생을 동력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사라진 세계>에는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달한 세상이 등장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도 부정적인 단면이 존재했다. 미래에 오히려 더 극심해진 빈부 격차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인원이 전부 '혈연'에 따라 선발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서러워지기도 했다. 인류 멸망은 내가 자초한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늘 약자라는 사실이 억울하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발달해도, 뒤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사라진 세계>는 보여준다. 현재에도 풀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과 이미 지나버린 과거. 그것들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이와 다르게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인간의 의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섀넌은 모두가 낙담하고 포기해버렸을 때에도 초심을 되새기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종말을 물리치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내는 그녀를 보면서 드라마 <도깨비> 속 대사를 떠올렸다 : '인간의 의지로 뚫지 못하는 문이 없구나(의지였는지, 절박함이었는지, 대사가 명확하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게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의 최후가 찾아와서 얼마만큼 잔인하게 세상을 뭉개버릴지 알 수 없지만, 섀넌 모스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허구에 불과하고, 곧 끝나버릴지라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금을 살아야겠다. 마치 지금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이고, 끝도 없이 영원할 것처럼.

그녀의 일생이란 1997년의 여러 상황이 만들어 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아주 작은 존재 가능성에 기댄, 마치 유령 같은 존재였다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