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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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읽으면 읽을수록 중압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끝없는 전쟁, 그리고 이런 운명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의 생애는 쉽게 마음을 파고들고, 이전까지는 흐릿하게 알고 있던 국가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소설이 과거의 일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와 '마리암'이라는 두 여성에게 주어지는 전쟁과 가부장제의 이중적인 억압이 고통스러워서, '라일라'와 '타리크'의 말도 안 되는 로맨스가 감격스러워서 울음을 참아가며 뒤로 갈수록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극악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버티게 해 준 '라일라'와 '마리암' 사이의 사랑이다. 전쟁통에 갑작스레 부모를 잃은 '라일라'에게 '마리암'은 어머니였으며, '라일라'는 '마리암'에게 '가족'이라는 꿈을 실현시켜 준 존재였다. 명분을 잃어버린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고향이 폐허처럼 변하고, 여성을 비인간화시키는 상황 속에서도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죄 없는 아이들을 지켜냈다. 어떠한 인정도 없었고, 괴팍하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꾸 솟아오르는 고난의 시기를 온몸으로 내리치며 나아갔다. 참는 것만이 여자의 미덕처럼 여겨지던 시기에 그들의 안에 꿈틀대던 분노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서로를 위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인간의 반을 집에 머물게 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할 수는 없죠."

라시드가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386쪽

'마리암'과 '라일라'의 남편인 '라시드'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부르카를 입지 않고 낯선 남자들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여성들에 대해 '현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은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다. 여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를 팔아넘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리암'의 어머니인 '나나'는 이런 말을 했다.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129쪽)" 그리고 이 글을 쓰던 오늘 잠깐씩 눈이 내렸다. 고향인 '카불'로 돌아가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려던 '라일라'의 낙관과 희망은 또 한 번의 억압으로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라일라'와 '마리암'에게서 "라시드나 탈레반이 깰 수 없는 깊은 마음속을 본다. 석회암처럼 단단하고 굳은 어떤 것.(559쪽)" 너무 많은 희생, 특히 여성에게 수백 년간 주어진 감금이 아프간에서 그만 반복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탈레반이나 전쟁, 테러리즘으로만 아프간을 기억하지 않고, 그곳의 놀라운 자연경관을 직접 목격하고 그 안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음미할 수 있는 날이 곧 우리에게 와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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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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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는 절멸을 목전에 둔 공간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총 10개의 단편이 촘촘하게 엮여져 한 권의 소설처럼 기능하고, 독자는 작가 천선란의 거대한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을 마주한다. 구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작가 천선란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이를 공상과학적인 요소로만 치부할 수 없다. 도리어 지구가 처한 갖은 위기를 떠올리고 기시감을 느낀다.


"네가 그랬지. 그들이 네 엄마의 이름만 제대로 불러줬어도 네 엄마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만 왔더라도.(213쪽)"


다 죽어가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단지 우리 자신만큼 외로운 서로를 발견한다. 하나와 하나가 이어질 때 우리의 '이름'은 서로를 잇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건 어디에나 있으면서 중첩되는 순간에도 마냥 같지만은 않아서 "태어나 평생 불리며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증명해(267쪽)" 준다. 각각의 작중인물은 자신이 신뢰하는 단 하나의 이름을 위해 살고 또 죽는다. 세상을 미워하고 절망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름이, 기다림이, 끌어당김이 결국은 해답일 것이라고 믿는 모순적인 마음, 아니 어쩌면 절박함이 『노랜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론이 뻔해서,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상대를 찾는 일이 세상에서 진짜 제일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서 단편의 마지막마다 작가에게 한 방 얻어맞은 채로 훌쩍훌쩍 잘도 울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 왜 살고 싶지 않다는 문장과 결합되지 않고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했는가.(353쪽)" 단편 「두 세계」의 문장은 『노랜드』를 잘 드러낸다. 작가는 폭발 직전까지 우리의 세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도 "숨을 쉬어야 한다고(354쪽)" 알려주는 존재를 곁에 심어둔다. 그들은 뇌우 속에서도 우리의 숨소리를 듣고, 우리의 이름을 생의 마지막까지 기억하기를 택한다. 그러니까 『노랜드』는 시대의 표어가 '적자생존'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는 흐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상대를 뛰어넘어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가 적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우리처럼(404쪽)"과 같은 문장을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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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4
임소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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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과학의 비판자 역할을 자처한다. 오랫동안 여성의 적으로 위치해 있던 "과학에 드리워진 객관성과 보편성, 가치중립성이라는 신비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12쪽)." 민음사의 새로운 인문 시리즈 '탐구' 중 하나로 공개된 이 책은 성염색체부터 임신, 인공지능 등 독자와 심리적으로 가까운 주제를 선정하여 흥미를 이끌어내면서도 관련된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깨부수어 과학과 멀어지고 있던 독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또한,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가 젠더로부터 자유로운 각양각색의 '모자이크 뇌'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의 가능성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우울증과 섭식장애, 임신 등을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성차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거나 신비로움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영역들을 적극적으로 들추고, 관련 연구자들에게 방향 재정립을 촉구한다. 더 나아가 '난자 냉동'에 뒤이어 '정자 냉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여성의 문제로만 여겨져 왔던 영역에 남성도 주인공으로 소환한다. 비서 로봇을 여성으로 만드는 등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을 기피하자고 주장하면서 여성에게 부여된 차별과 혐오를 의식적이고 인공적으로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긴다. 에코 페미니스트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여성의 주임무처럼 여겨졌던 '돌봄'을 '인류세'의 주요 구출 전략으로 제시하며 글은 마무리된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 서로 결합되기 위한 시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자들이 과학을 친구로 삼는 문화 속에서 탄생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이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의 결합 과정 속에서 유의미한 일을 해낼 가능성을 믿는다.

일반적인 성형 수술이 마치 수술받지 않은 양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는 데 반해 오를랑은 그 과정을 공개해 보이지 않는 성형 수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의도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택해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지 않은 괴물이 됨으로써 성형 수술을 가부장적 미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닌 페미니스트 미학의 도구로 전유했다. - P159

2007년 미국 국가 과학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 페이 에이젠버그셀러브는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든 다른 어느 대학이든 이류밖에 안 되는 남자 교수가 많다. 나는 이류밖에 안 되는 여성 연구자가 대학 정년직을 받는 것을 봐야만 성차별이 없어졌다고 믿겠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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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양장)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소설Y
구병모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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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지긋지긋하다.'라고 외치는 우리의 작중 인물은 신변의 위협에 처하자 아이러니하게도 한 빵집에 숨어든다. 이 빵집은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희귀한 빵과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시간을 되돌리기도 하며, 장사를 최소한 말아먹지는 않도록 부적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오갈 데 없이 경찰에게 뒤쫓기게 된 청소년을 '위저드 베이커리'의 사장은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은 채로 숨겨준다. 누구에게도 개방된 적 없던 오븐의 통로를 열어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면서 이들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36쪽)"


잘못된 때와 장소에 존재한 죄로 아이는 쫓기듯이 빵집으로 도망쳐 나왔다. 새 가족에게 갑작스레 범죄자로 몰리던 순간과 친엄마에게 청량리역에서 버려지던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아이는 자기 존재의 타당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일 리는 없다는 좌절이 머릿속에서 뒤엉킨다. 그런 아이를 위로하는 건 '빵'이다. '빵'은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아이의 지긋지긋한 생존수단이자, 단 한 입만으로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유일한 유품이다. 아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빵'을 매개체로 하나로 연결된다. '빵'이라는 수단을 통해 아이는 상처받은 과거를 견디고 나면 그 길의 끝에서 마법 같은 미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픈 과거는 미래의 특별한 만남을 위한 하나의 복선으로 작용한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빵에는 과거와 현재 대신 미래가 들어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나 환상이 아니다. 사장은 빵을 만들어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면서 그들에게 행복을 떠먹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거운 책임감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빵에 포함된 모든 마법의 힘은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그 과정 속에서 손님들에게 모든 일은 불가피하며, "흘러가는 대로, 일어나도록 둘 수밖에 없는 일이 있(141쪽)"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손쉽게 과거로 돌아가서 인생을 두 번 살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뻔한 말을 또 주워섬겨야겠다. 입속은 단데 현실도 그만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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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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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는 '구술사' 과목을 공부하는 일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다. 누구에게도 환대 받지 못하는 구술사 수업에 '라나'가 이토록 열을 올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구술사 연구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라나'는 지금의 콜로니로 이주하면서 자신이 세상 저편에 두고 온 '유령'들, 그러니까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생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받은 애정 어린 도움은 물론이고, 그들은 결국 그 자신이므로 '라나'는 과거를 과거로만 묻어두지 않는다. 온갖 사연으로 전뇌화 사이보그가 된 '로티'와 '터너'는, 그리고 그들을 책임지기 위해 다 죽어가는 동네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엘리'는 '라나'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를 이루고 있는 현재에 가깝다.


'라나'는 '유령'들을 세상 앞에 꺼내놓기 위해 "아주 단단한 무언가를" 부숴야만 하고, 여기에는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108p)"하다. 특히 그는 '유령'들이 제모습을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북돋는다는 이유로 더 단단하고 기다란 벽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되려 자신이 몸을 숨겨야 하는 순간이 와도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로티'와 더 멀리 함께 가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부끄러워한다. 하나의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나온 것들과 받은 것들을 곱씹는다.


작가는 "개인적이고 맹렬한 동기로 견고한 문법을 부수는 사람의 마음(111쪽)"을 소설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의 언니가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온몸을 던져 싸우고 싶은 그 마음이 감히 이해가 되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건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이 나에게만큼은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치졸한 마음에 대한 수치심이다.


작가 개인 안에 고여있던 외로운 이야기가 책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왔을 때 그가 느꼈을 어떤 충만함을 감지한다. 그런 작가에게 '라나'가 들었고, 또 듣기를 아주 오랫동안 염원해 왔을 말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당신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이를 매 순간 기억할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바뀌었(108쪽)"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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