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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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를 떠올리면 어쩐지 엄마, 하고 부르고 싶어진다. 엄마, 하면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와 작가 박완서는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박완서의 문학을 이제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이 이토록 독자들의 마음을 울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타계 10주년 즈음하여 출간되었던 작가의 에세이 결정판이 새로운 표지로 단장해 여우눈 에디션으로 재출간되었다. 사람 안에서 좋은 점을 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문학과 참 잘 어울리는 표지라는 생각이 든다. 숱한 고민으로 짓눌렸던 나의 마지막 20대는 작가 박완서의 문학 앞에서 눈 녹듯이 녹아내린다.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 작가는 깊숙한 내면까지 파고드는 글쓰기를 선보인다. 하루빨리 죽음에 다가서고 싶던 시절부터 세상 사람들 안에 내재된 선과 그로 인한 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나날들까지 일상 속의 감상을 기록하여 독자들을 울고 웃게 만든다. "예사로운 아름다움도(118쪽)" 작가의 손을 거쳐 "깜짝 놀랄 빼어남(118쪽)"으로 빛이 난다. 밤새 꼭꼭 씹은 문장들은 그 다음날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노후의 자신을 가만히 그려보는 계기가 되곤 한다.


2021년, 작가 박완서의 타계 10주기라는 소식을 듣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21C는 야속하게도 마지막 숫자를 또 한 번 갈아치웠다. 세상은 전례 없이 팍팍하고, 개인적인 삶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시기에 작가 박완서의 글 안에서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202쪽)"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작지 않은 축복이었다. 삶을 이만치 버틸 수 있는 건 완전히 나쁜 삶이나 완전히 좋은 삶은 없다고, 세상의 선함을 믿고 살다 보면 얼마든지 신기한 발견을 하게 된다고 말해주는 작가 박완서를 비롯한 문인들의 글이 있기 때문 아닐까.


생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자신이 듣게 될 것이라 예감했던 말을 결국 듣게 되었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247쪽)"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똑같이 눈물이 날 것 같다.


(출판사 지원도서)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 P151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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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녀 - 꿈을 따라간 이들의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김남주 옮김 / 이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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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해와 별이 멀리 있고 가까이 있고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그는 알았다. 그를 고향 땅에서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의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다구는 긴 여행으로 어떤 대단한 지혜를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다.(224쪽)

선대로부터 전해 들은 전설을 바탕으로 알래스카 원주민의 정체성을 담은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는 작가 벨마 월리스의 두 번째 소설 『새소녀』를 읽었다. 『두 늙은 여자』에서처럼 생존을 위한 강인함과 인내심,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더 넓고 먼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간다. 각각의 무리에서 별종으로 취급받고,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새소녀'와 '다구'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전통의 깊이와 젊음의 패기를 동시에 감각한다. 모험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면서, 한편으로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새소녀』는 『두 늙은 여자』 만큼이나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우리의 내일에 이전보다도 더 큰 기대와 믿음을 품을 수 있도록 만든다.


『새소녀』는 생존을 위해 집단의 결속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문화에 어울리지 못한 채로 자유와 모험을 꿈꾸는 '새소녀'와 '다구'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측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공동체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하는 집단에게 '새소녀'와 '다구'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세상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건 공동체 부양을 위한 성고정화된 역할과 결혼, 그리고 재생산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에 더 관심이 많았던 '새소녀'와 '다구'는 부여받은 정상성으로부터 결국 탈출을 감행한다. 갖은 시련을 견디며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간 '새소녀'와 '다구'는 도리어 본래부터 자신의 곁에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는다.


작가 벨마 월리스의 작중 인물들은 시시각각 생존을 위협받는 무리 밖의 생활을 통해 자신만의 힘을 구축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새소녀'와 '다구' 또한 꿈의 좌절과 현실로의 복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울타리 밖에서 찾을 수 없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붙잡고 공동체에 구속되지 않은 자신만의 인생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고유한 정체성과 공동체 안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모두 지켜내는 작가 벨마 월리스의 글은 따스한 위안은 물론, 인간관계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깊이 있고 현명한 조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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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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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존과 조너선이 모든 것을 이해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시간 경과로는 동트게 할 수 없는 새벽의 특징이다. 우리 두 눈을 어둡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이다. 우리가 깨어나는 날이야말로 비로소 새벽이 동트는 날이다. 앞으로 동터야 할 많은 날이 있다. 태양은 아침에 떠오르는 별일뿐이다.(444쪽)


소로의 대표작이자 불멸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월든』은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등장하며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드라마를 통해 관심을 받기 이전부터 번번이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끝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월든 호수 옆 숲속에 거주하며 자연과 공존하고, 덜 소유하기 위해 시도하는 소로의 태도는 존경할 만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영 와닿지가 못했다. 그리고 현대지성에서 새롭게 출간한 버전으로 소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데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된 『월든』은 「시민 불복종」을 함께 수록하여 소로의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더불어, 번역가 이종인의 깊이 있는 번역과 작품 해제, 그리고 사진작가 허버트 웬델 글리슨의 사진은 독자들이 생생하게 『월든』의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소로의 월든 생활은 세속적인 요구와 기대를 저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소로는 하나로 고정된 성공의 이미지를 부정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더 많은 것들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평생 동안 일을 하지만,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입구가 비좁기 때문에 우리는 잃고만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로가 보기에 훨씬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현대인을 가장 두렵게 하는 가난과 외로움은 그 앞에서 무력화된다. 그건 도리어 삶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는 감미로운 기회로 작용한다.

시끌벅적함과 풍족함의 면에서 소로는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월든과 화이트, 두 호수에게서 오는 힘은 소로를 그 누구보다도 충만한 인간으로 만든다. 자연 안에서 느끼는 일체감과 자유야말로 소로가 추구하는 '더 높은 법'이다. 호수는 인류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부추기며,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적인 굴레들의 실체를 발가벗긴다. 초월주의를 향한 소로의 숭배는 호수로부터 시작하여 호수로 끝을 맺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소박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서서 더 큰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소로의 주장이 꿈꾸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지만, 우리가 성공하려고 절망적일 정도로 분투하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소로의 방식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기도 하다.




「시민 불복종」에서는 사회적 행동주의자로서의 소로를 만나볼 수 있다. 자기 방식에 대한 확신과 미약한 시작으로 원대한 결과를 맞이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만큼은 「시민 불복종」과 『월든』의 공통분모이다. 또한, 자연 안에서의 평등한 자유를 경험한 소로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에 반대하고 행동하는 훗날의 소로가 탄생했다는 생각도 든다. 소로는 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맨 앞에 내세웠으며, 누구도 개인에게 무언가에 복종하기를 강요할 수 없다고 믿었다. 소로는 국가와 정부의 능력과 실천력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시민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국가와 정부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말한다. 개인에게 더 독립적이고 강력한 권력을 쥐여주려 한다는 점에서 소로의 생각은 무자비한 혼란을 연상시킨다. 한편으로, 국가라는 주류 질서에서 벗어난 개인도 국가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국가의 울타리 밖에서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생각하면 말이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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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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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의 북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칠대로 지친 무리의 한가운데 '두 늙은 여자'가 있다. 그들이 하는 거라곤 온갖 것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일뿐이다. 각각 '칙디야크'와 '사'로 불리는 두 명의 여성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우리가 노인에게 부정적인 프레임을 덧씌울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회로 얼룩진 삶을 살고, 그들 자신과 우리를 향해 쉼없이 비난을 가한다. 그러나 '벨마 월리스'는 우리의 편견으로부터 성큼성큼 멀어진다. '칙디야크'와 '사'는 늙음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며, 외롭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대의 고독사를 노인에게서 떼어내는 데 성공한다. 『두 늙은 여자』는 한번뿐인 생애동안 진정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우리는 이 소설로부터 어떻게 하면 삶을 살아내고 또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배운다.


'칙디야크'와 '사'는 아주 드물게 내재된 잠재력을 발휘할 결정적인 기회를 얻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은 후 그들은 도리어 자신들 안에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음을, 자신에게는 아직 살 권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세간의 평가는 그들을 전혀 위축시키지 못한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한 배신의 경험이 그들에게 잔인한 트라우마를 남겼더라도, 그들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11쪽)"을 입증해 보였다. 우리가 원한다면 나이나 성별 따위의 제약은 극복 가능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점점 더 늘어나는 수명과 노인들을 향한 배척의 시선을 고려한다면, 『두 늙은 여자』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들은 제약받은 가능성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 가까워지는 거야. 오늘 나는 몸이 좋지 않지만, 내 마음은 몸을 이길 힘을 갖고 있어. 내 마음은 우리가 여기서 쉬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69쪽)


'칙디야크'와 '사', 그리고 그들의 무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진 지점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함께 자신들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척박한 땅 위에서 쉴새없이 이동하며 살아남은 원주민들의 생명력은 경이롭고, 또 고무적이다. 이 책을 통해 지긋지긋한 전세계적인 고비 안에서도 우리 안의 끝없는 가능성과 연대의 힘을 느낀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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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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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콜롬비아 대학원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빌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첫 합평 시간에 '나'의 작품이 물어뜯기고 있던 와중에 '빌리'가 한 명의 영웅처럼 내 앞에 등장한다. '빌리'는 예술가로서 심각한 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출신 성분과 더불어, 인간관계에 필요한 자연스러움을 터득하지 못한 채로 태어난 '나'와 확연하게 다르다. 그는 중서부의 도시를 원천으로 한 출중한 문학적 재능은 물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주위를 맴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가 필요로 했던 모든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지니고 있을뿐더러, '나'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빌리'의 위치는 순식간에 견고해진다. 자신과 '빌리'를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로 비유하는 '나'는 특히 물질적으로 희생해 가며 '빌리'와의 관계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나'와 '빌리'의 동거는 자신만큼의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지 못한 '빌리'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물질적 제공 덕분에 문학적 재능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학업을 이어 나가는 '빌리'를 보면서 처음엔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경제적 차이로 인한 그들의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 '나'가 아닌 '빌리'가 도리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 '나'가 아니었다면 '빌리'는 뉴욕에 남아있지도 못했을 테지만, 이제 그런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빌리'는 교수들의 이목을 끌며 자신의 '꿈의 구장'으로 달려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미래에 자신이 작가로서 결코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입지는 '빌리'에게 '은폐 가능한 낙인'이 존재할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이 확실해 보이던 초반에 '나'는 그 낙인에 대해 연민과 동정심을 표하며, 둘의 관계를 시작한다. 그러나 종래에는 거주지를 빼앗김으로써 '나'는 '빌리'와의 관계를 유지할 일말의 희망조차도 상실하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차린 '나'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휩싸여 결국 들통나게 될 범죄까지 저지른다. '빌리'의 낙인에 대한 '나'의 심경 변화는 각각 한쪽 다리와 한 쪽 팔을 잃은 사람들을 만난 '나'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이후 자신의 권위가 서서히 추락하던 시점에 한 쪽 팔을 잃은 사람을 마주친 나는 "한쪽 팔이 없어도 매우 편안해 보이고, 반팔 옷을 입어서 드러낼 만큼 아무런 심리적 어려움이 없는 그 죄 없는 남자에게(245쪽)" 분노와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에게 꼭 맞는 영혼을 찾았다고 믿었던 기대가 좌절되면서 '나'는 결국엔 끝없는 외로움만을 감각한다. "이미 소외된 하위문화 속에서 또 변두리에 머무르는 (250쪽)" 이의 내밀한 서사는 소설 밖의 독자들까지 처절한 외로움 속으로 끌어들인다. 손 닿는 곳에 언제나 애정과 인정이 있는 특권을 누렸던 '빌리'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꿈의 구장'이자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던 '빌리'의 '특별한 윤곽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크고 싶은 구멍을 만들어 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빌리'와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인생의 한 부분을 모조리 뒤에 남겨둔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빌리'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남겼지만, 삶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나'는 쪼그라들지 않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빌리' 이후로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나'가 성장했다기보다는 고독과 함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빌리'와의 추억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아직 여기 있어.(301쪽)" 그 과거는 '나'가 지금 여기에 아직 살아있음을 몇 번이고 되새기게 하는 장치로 남을 것이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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