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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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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콜롬비아 대학원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빌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첫 합평 시간에 '나'의 작품이 물어뜯기고 있던 와중에 '빌리'가 한 명의 영웅처럼 내 앞에 등장한다. '빌리'는 예술가로서 심각한 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출신 성분과 더불어, 인간관계에 필요한 자연스러움을 터득하지 못한 채로 태어난 '나'와 확연하게 다르다. 그는 중서부의 도시를 원천으로 한 출중한 문학적 재능은 물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주위를 맴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가 필요로 했던 모든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지니고 있을뿐더러, '나'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빌리'의 위치는 순식간에 견고해진다. 자신과 '빌리'를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로 비유하는 '나'는 특히 물질적으로 희생해 가며 '빌리'와의 관계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나'와 '빌리'의 동거는 자신만큼의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지 못한 '빌리'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물질적 제공 덕분에 문학적 재능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학업을 이어 나가는 '빌리'를 보면서 처음엔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경제적 차이로 인한 그들의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 '나'가 아닌 '빌리'가 도리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 '나'가 아니었다면 '빌리'는 뉴욕에 남아있지도 못했을 테지만, 이제 그런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빌리'는 교수들의 이목을 끌며 자신의 '꿈의 구장'으로 달려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미래에 자신이 작가로서 결코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입지는 '빌리'에게 '은폐 가능한 낙인'이 존재할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이 확실해 보이던 초반에 '나'는 그 낙인에 대해 연민과 동정심을 표하며, 둘의 관계를 시작한다. 그러나 종래에는 거주지를 빼앗김으로써 '나'는 '빌리'와의 관계를 유지할 일말의 희망조차도 상실하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차린 '나'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휩싸여 결국 들통나게 될 범죄까지 저지른다. '빌리'의 낙인에 대한 '나'의 심경 변화는 각각 한쪽 다리와 한 쪽 팔을 잃은 사람들을 만난 '나'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이후 자신의 권위가 서서히 추락하던 시점에 한 쪽 팔을 잃은 사람을 마주친 나는 "한쪽 팔이 없어도 매우 편안해 보이고, 반팔 옷을 입어서 드러낼 만큼 아무런 심리적 어려움이 없는 그 죄 없는 남자에게(245쪽)" 분노와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에게 꼭 맞는 영혼을 찾았다고 믿었던 기대가 좌절되면서 '나'는 결국엔 끝없는 외로움만을 감각한다. "이미 소외된 하위문화 속에서 또 변두리에 머무르는 (250쪽)" 이의 내밀한 서사는 소설 밖의 독자들까지 처절한 외로움 속으로 끌어들인다. 손 닿는 곳에 언제나 애정과 인정이 있는 특권을 누렸던 '빌리'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꿈의 구장'이자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던 '빌리'의 '특별한 윤곽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크고 싶은 구멍을 만들어 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빌리'와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인생의 한 부분을 모조리 뒤에 남겨둔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빌리'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남겼지만, 삶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나'는 쪼그라들지 않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빌리' 이후로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나'가 성장했다기보다는 고독과 함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빌리'와의 추억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아직 여기 있어.(301쪽)" 그 과거는 '나'가 지금 여기에 아직 살아있음을 몇 번이고 되새기게 하는 장치로 남을 것이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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