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양장)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소설Y
구병모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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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지긋지긋하다.'라고 외치는 우리의 작중 인물은 신변의 위협에 처하자 아이러니하게도 한 빵집에 숨어든다. 이 빵집은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희귀한 빵과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시간을 되돌리기도 하며, 장사를 최소한 말아먹지는 않도록 부적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오갈 데 없이 경찰에게 뒤쫓기게 된 청소년을 '위저드 베이커리'의 사장은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은 채로 숨겨준다. 누구에게도 개방된 적 없던 오븐의 통로를 열어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면서 이들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36쪽)"


잘못된 때와 장소에 존재한 죄로 아이는 쫓기듯이 빵집으로 도망쳐 나왔다. 새 가족에게 갑작스레 범죄자로 몰리던 순간과 친엄마에게 청량리역에서 버려지던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아이는 자기 존재의 타당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일 리는 없다는 좌절이 머릿속에서 뒤엉킨다. 그런 아이를 위로하는 건 '빵'이다. '빵'은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아이의 지긋지긋한 생존수단이자, 단 한 입만으로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유일한 유품이다. 아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빵'을 매개체로 하나로 연결된다. '빵'이라는 수단을 통해 아이는 상처받은 과거를 견디고 나면 그 길의 끝에서 마법 같은 미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픈 과거는 미래의 특별한 만남을 위한 하나의 복선으로 작용한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빵에는 과거와 현재 대신 미래가 들어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나 환상이 아니다. 사장은 빵을 만들어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면서 그들에게 행복을 떠먹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거운 책임감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빵에 포함된 모든 마법의 힘은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그 과정 속에서 손님들에게 모든 일은 불가피하며, "흘러가는 대로, 일어나도록 둘 수밖에 없는 일이 있(141쪽)"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손쉽게 과거로 돌아가서 인생을 두 번 살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뻔한 말을 또 주워섬겨야겠다. 입속은 단데 현실도 그만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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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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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는 '구술사' 과목을 공부하는 일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다. 누구에게도 환대 받지 못하는 구술사 수업에 '라나'가 이토록 열을 올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구술사 연구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라나'는 지금의 콜로니로 이주하면서 자신이 세상 저편에 두고 온 '유령'들, 그러니까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생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받은 애정 어린 도움은 물론이고, 그들은 결국 그 자신이므로 '라나'는 과거를 과거로만 묻어두지 않는다. 온갖 사연으로 전뇌화 사이보그가 된 '로티'와 '터너'는, 그리고 그들을 책임지기 위해 다 죽어가는 동네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엘리'는 '라나'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를 이루고 있는 현재에 가깝다.


'라나'는 '유령'들을 세상 앞에 꺼내놓기 위해 "아주 단단한 무언가를" 부숴야만 하고, 여기에는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108p)"하다. 특히 그는 '유령'들이 제모습을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북돋는다는 이유로 더 단단하고 기다란 벽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되려 자신이 몸을 숨겨야 하는 순간이 와도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로티'와 더 멀리 함께 가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부끄러워한다. 하나의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나온 것들과 받은 것들을 곱씹는다.


작가는 "개인적이고 맹렬한 동기로 견고한 문법을 부수는 사람의 마음(111쪽)"을 소설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의 언니가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온몸을 던져 싸우고 싶은 그 마음이 감히 이해가 되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건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이 나에게만큼은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치졸한 마음에 대한 수치심이다.


작가 개인 안에 고여있던 외로운 이야기가 책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왔을 때 그가 느꼈을 어떤 충만함을 감지한다. 그런 작가에게 '라나'가 들었고, 또 듣기를 아주 오랫동안 염원해 왔을 말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당신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이를 매 순간 기억할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바뀌었(108쪽)"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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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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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자아를 몇 번이고 부정하지만 에세이 한 권으로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박정민부터 <씨네 21>의 이다혜 기자까지, 화려한 라인업만으로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기엔 충분하다. 그러나 내겐 쓰고 싶은 마음과 쓰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 책의 제목이 좀 더 매혹적이다. 누구도 보지 않을 블로그를 계속하면서 나 또한 그런 가슴 앓이를 하기 때문이다. "꼭 내가 써야 하는 글이 세상에 있을까?(78쪽)" 내가 쓴다고 해서 누가 보기나 할까? "수요가 없는 공급(123쪽)"의 외로움을 지속적으로 느끼면서도 결국 노트북 앞에 앉는다.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곳을 향해 사는 것 말고는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을(42쪽)" 나 또한 모르는 탓이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에는 쓰고 싶지 않다고 이유를 가득 적으면서도 이 책의 지면을 채우고 있는 9명 필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은 "결과가 어떻든 쓰기 만만했던 글은 단 한 편도 없었다.(93쪽)"고 토로하면서도, 갖가지 이유로 계속해서 글을 쓰며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누군가는 이미 받은 돈 때문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쓰고 싶지 않으면서도 엄청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동기로 작용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만족시키기 어려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꼬박꼬박 살아내는 우리 모두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겨움, 스트레스, 자기혐오와 동시에 즐거움과 흥미, 관심, 열정을 동시에 준다.(주는 거 맞지?)(181쪽)"는 면에서도 글쓰기와 삶은 닮아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붙들고 죽자 살자 매달려(83쪽)" 자신만의 답안지를 채운다는 점에서도 물론 그렇다. 고작 찰나의 순간을 위해 우리는 계속 싫은 것들을 견디고 있다. 비실용적인 태도이긴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다. "나는 비극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비극의 영웅이다.(229쪽)" 글 쓰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행복을 목격하고자 글쓰기라는, 혹은 삶이라는 함정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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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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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적응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변화가 곧 하느님이니까.


1990년대에 직조해 낸 또 하나의 디스토피아. '옥타비아 버틀러'가 예언한 불행이 2024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코로나 시대를 이제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코앞에 또 다른 종말론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번만큼은 어떤 징조를 미리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로 이끌었다. 선천적으로 '초공감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질병을 앓고 있는 '로런'을 주축으로 세워진 세계관은 독자에게 놀라움보다 허망함을 선사한다. 방식과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자기와 같은 부류가 아니면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본질은 같다. 타인을 향한 적대적인 마음과 배척의 태도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그렇기 때문에 '로런'의 흑인, 여성, 그리고 초공감증후군 보유자로서의 소수자성은 가장 큰 걸림돌처럼 보인다. 초공감증후군은 타인의 고통과 쾌락을 함께 느끼는 것으로, 타인이 받는 충격을 함께 흡수해야 하므로 '로런'은 태생적으로 완전한 공격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약해졌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공동체가 부재한다면 '로런'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런'은 이 디스토피아를 구할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잡는다. 그녀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곁에 남으려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변화는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벼랑 끝에 서있던 사람들은 혼자 살아남기보다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형성된 '로런'의 공동체는 작가의 디스토피아 안에 천국의 씨앗을 심는다. '로런'은 이 무리를 '지구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변화가 곧 하느님'이라는 신조를 내세운다. 그녀를 위시하는 '지구종' 무리는 "한자리에 붙박인 채 흔적 없이 멸종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변화라는 하느님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그들은 최악의 시기를 견뎌내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실천을 앞세운다. 타인을 향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변화를 위한 작은 실천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세운 디스토피아의 대항마이다.


'로런'은 자신의 초공감증후군을 밖에 내보이기를 꺼려했다. "나를 상처 입히기가 얼마나 쉬운지 남들에게 알려주느니 차라리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놔두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런'은 결국 자신의 약점을 알면서도 이용하지 않는 선한 지구종들을 찾아냈고, 그들을 하나로 뭉쳐놓았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타인에게 상처를 내지 않은 채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건 '로런'의 2024년뿐만 아니라, 2022년의 여기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어야만 자신의 삶이 나아진다고 너무 쉽게 믿는다. 더욱 아쉬운 것은 결정권자는 배제된 채로 약자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문제가 흐지부지 종결된다. 모든 이가 다른 모든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초공감증후군을 나눠주고 싶다는 '로런'의 바램은 지금 여기에도 유효하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난 '로런'의 씨앗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는 소설에 나와있지 않다. <누가복음>의 한 구절에 매달리는 일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로런'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로 이어진다. '로런'과 그녀의 공동체가 함께 뿌린 씨앗이 2030년대에 어떤 싹을 피우게 되었을지 다음 권의 이야기가 몹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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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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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저주토끼」부터 마지막에 배치된 「재회」까지 작가 정보라는 독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평범한 서사도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온몸이 오싹거리게 만든다. 일상에서도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에 사는 N형 인간은 잠들기 전에 독서를 시도하다 끝내 실패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가며 읽기 시작했다. 사실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반전보다 작가의 삶에 대한 어떤 태도가 무척 인상 깊었다. 삶을 향한 격렬한 움직임 끝에 우리는 인생의 쓸쓸함과 외로움만을 배우게 된다는 담담한 어조가 마음에 남았다. 작가가 삶의 외로운 뒷면을 내보일 때 우리가 느끼는 건 실패에 대한 좌절감이 아니다. 그 대신에 역시 그렇지, 하는 묵묵한 끄덕임이 뒤따른다. 전무후무한 역병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이 혼자라는 진리 하나만을 건져 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일이 크게 놀랍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 정보라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아주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유령이나 저주인형,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등 우리가 공상이라고 믿는 일들이 몹시 자연스럽고 실제적인 현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소설 곳곳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갈망과 존재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엿보인다. 작중인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 이상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있다. "누군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주기를 기다리면서.(323쪽)"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살아있음에 큰 기쁨을 누리지 못한 피조물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알아줄 이는 아무도 없다. 작가 정보라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동정과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라는 문장이 "유일한 위안(34쪽)"이 된다. 이는 나의 몫으로 주어진 뒤틀린 삶을 살아가겠지만, 이를 반복할 존재는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였던 아이가 누군가의 알아봄으로 인해 점점 더 분명한 형체와 무게를 가지게 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우리의 불행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때로는 이런 극복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이 삶을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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