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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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적응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변화가 곧 하느님이니까.


1990년대에 직조해 낸 또 하나의 디스토피아. '옥타비아 버틀러'가 예언한 불행이 2024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코로나 시대를 이제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코앞에 또 다른 종말론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번만큼은 어떤 징조를 미리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로 이끌었다. 선천적으로 '초공감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질병을 앓고 있는 '로런'을 주축으로 세워진 세계관은 독자에게 놀라움보다 허망함을 선사한다. 방식과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자기와 같은 부류가 아니면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본질은 같다. 타인을 향한 적대적인 마음과 배척의 태도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그렇기 때문에 '로런'의 흑인, 여성, 그리고 초공감증후군 보유자로서의 소수자성은 가장 큰 걸림돌처럼 보인다. 초공감증후군은 타인의 고통과 쾌락을 함께 느끼는 것으로, 타인이 받는 충격을 함께 흡수해야 하므로 '로런'은 태생적으로 완전한 공격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약해졌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공동체가 부재한다면 '로런'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런'은 이 디스토피아를 구할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잡는다. 그녀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곁에 남으려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변화는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벼랑 끝에 서있던 사람들은 혼자 살아남기보다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형성된 '로런'의 공동체는 작가의 디스토피아 안에 천국의 씨앗을 심는다. '로런'은 이 무리를 '지구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변화가 곧 하느님'이라는 신조를 내세운다. 그녀를 위시하는 '지구종' 무리는 "한자리에 붙박인 채 흔적 없이 멸종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변화라는 하느님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그들은 최악의 시기를 견뎌내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실천을 앞세운다. 타인을 향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변화를 위한 작은 실천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세운 디스토피아의 대항마이다.


'로런'은 자신의 초공감증후군을 밖에 내보이기를 꺼려했다. "나를 상처 입히기가 얼마나 쉬운지 남들에게 알려주느니 차라리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놔두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런'은 결국 자신의 약점을 알면서도 이용하지 않는 선한 지구종들을 찾아냈고, 그들을 하나로 뭉쳐놓았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타인에게 상처를 내지 않은 채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건 '로런'의 2024년뿐만 아니라, 2022년의 여기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어야만 자신의 삶이 나아진다고 너무 쉽게 믿는다. 더욱 아쉬운 것은 결정권자는 배제된 채로 약자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문제가 흐지부지 종결된다. 모든 이가 다른 모든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초공감증후군을 나눠주고 싶다는 '로런'의 바램은 지금 여기에도 유효하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난 '로런'의 씨앗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는 소설에 나와있지 않다. <누가복음>의 한 구절에 매달리는 일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로런'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로 이어진다. '로런'과 그녀의 공동체가 함께 뿌린 씨앗이 2030년대에 어떤 싹을 피우게 되었을지 다음 권의 이야기가 몹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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