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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이의 딸
마리 니미에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발표한 『푸른 경기병』으로 프랑스 문단에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던 작가가 있다. 그 작가는 그 후 프랑스 문단에서 <경기병파>의 수장이 되어 당대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았지만 스물아홉에 절필하고 서른여섯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책『슬픈 아이의 딸』이라는 제목은 그 작가의 작품인 『슬픈 아이』에 ‘딸’이라는 단어를 넣어 지었다. ‘로제 니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작가이며 이 책의 작가인 ‘마리 니미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요절한 작가와 그 딸의 이야기, 꽤 괜찮아 보이는 플롯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문단에서는 천재작가이며 인정받은 작가였지만 가족에겐 상처와 아픔만을 남긴 빵점짜리 아버지일 뿐이었다.
가족과의 사진 찍기는 싫어했지만 마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사진들을 수없이 남겼으며, 아버지가 있되 가족에겐 늘 부재중인 아버지였다. 갓난아이였던 오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갖다대는 끔찍한 제스처를 취했고, 술고래이기도 했다. 또한 마리가 정성껏 만들어준 소꿉놀이의 플라스틱 계란 반숙 프라이를 휴지통에 버리기도 했다. 꽁초 한 개가 노른자 오른쪽 귀퉁이에 플라스틱이 검게 타서 파인 분화구처럼 꽂인 채. 자기세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훌륭한 작가였던 로제 니미에가 말이다.
마리 니미에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담담하게 풀어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어렴풋한 기억들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존하며 하나하나 맞춰 나간 그 기억의 조각들은 마리 니미에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엔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한 작업이었기도 하다. 로제 니미에의 전기소설인 듯, 마리 니미에의 자전소설인 듯한 이야기에서 마리 니미에의 작가로서의 재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기로 작정을 한 이유엔 로제 니미에의 유품을 경매하는 한 장소에서 본 편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로제 니미에가 마리가 태어나던 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결국, 어제 아내가 딸을 낳았네.
나는 즉시 그애를 센 강에 처넣어버렸어. 더이상 그애 이야기를 듣고 싶지가 않거든.“
이런 글은 그 어떤 딸이 읽어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리 니미에 역시 그랬다. 마치 오래전 이유도 모른 채 행했던 자신의 자살 시도와 살면서 막연하게 생긴 두려움과 불안함,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조정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 생각에 이르자 그제야 마리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아니,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침묵’이 아니라 고통이 있더라도 토해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내내 마리 니미에의 대단한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어느 누구도 프랑스 문단의 영웅적인 천재 작가임을 부정하지 않는 로제 니미에에 대해 이토록 까발리는(?) 딸을 곱게 보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이 책이 메디치 상까지 받은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면도칼로 생살을 저미는 고통 속에 복원된 아버지 로제 니미에, 그 고통 속에 작가의 정신적 고뇌가 그대로 드러남으로써 그런 시선들이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았을까?
마침내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 딸의 아버지를 향한 길고도 긴 기억의 여정, 비로소 그녀는 어린애에서 사연을 지닌 어른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침내 내 세상에 휴식시간이 찾아온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