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에서부터 출간 순서임)

 

어제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에 선풍기를 켜놓고 종일 책상에 앉아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끈적거리며 내 몸에 달라 붙었지만, 줄리 델피의 Waltz For A Night 와 캐리 멀리건의 New york, New york 그리고 탕웨이가 부른 만추의 음악들이 그 끈적거림과 잘 어울렸...다(좋았다는 말이다 ㅎㅎ) 이 노래들은 신형철 평론가가 추천해준 음악들이다. 이 세 곡 외에도 한석규가 부른 8월의 크리스마스,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가 있었다. 좋았다. 다 좋았다.

 

어제 신형철 평론가의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하루키의 단편들을 낭독해주었다. 위 곡들은 낭독 전에 그가 추천해준 음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학이야기 팟캐스트가 (다들 말하는) 삼사 출판사의 팟캐스트 중에 가장 내 취향에 맞다고 생각한다(내 성격이 워낙 조용하고, 조신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쿨럭) 근데 이것들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나와 잘 맞는다는 소리다ㅋ) 좋아하는 출판사라거나 애정하는 진행자라서와 같은,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웃거나 떠들지(!) 않아 가끔은 졸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진행 방식이 맘에 든다.

 

특히 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솔직히 그동안 하두 많이 나와서, 이 책 저 책 뒤죽박죽 책 사기도 두려웠다. 이 책에 있는 단편이 저 책에 또 있을까봐. 그것 은근 헷갈리니까. 그런데 신형철 평론가가 이번에 싹, 정리를 해주었다. 출간된 순서로, 설명을 덧붙이면서. 총 10권이다.

 

중국행 슬로보트

캥거루 날씨(사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반딧불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빵가게 재습격

TV피플

렉싱턴의 유령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

도쿄기담집

여자 없는 남자들

 

그러니까, 위 제목의 책 외에는 모두 베스트 단편집인셈. 음반으로 말하면 컴필레이션 앨범이라고나 할까. 이 제목의 책들을 사면 중복이 될 경우가 없다는 사실, 나는 이번에야 알았다. 알고 나니 소장의 욕구가 마구 생기고, 장바구니에 막막 넣게 되고, 결국엔 결제를 하고 말겠...지...만(그만 사! 라는 친구의 외침이 들리고;;)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듣는 것. 어색하고 이상할 줄 알았는데 신형철 평론가가 읽어주던 어제의 하루키 단편들은 정말, 참 좋았다. 어쩌면 끈적거리는 날씨 탓에 차분하게 읽어주는 목소리가 더 좋았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가 추천한 음악들도 한몫하고. 아무튼 안 들어본 사람들은 꼭 들어보길 바란다. 나처럼, 졸리거나 지루함을 잘 견디는 사람이라면. 꼭!^^

 

 

 

그리고(뜬금없이 ㅋ)

 

어제 읽은 애정하는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좀 딱딱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술술 읽힌다. 가끔 무슨 소리인지 한참 들여다보는 문장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보통의 문체가 느껴져서 읽는 내내 좋았다. 지금 SNS와 쏟아지는 뉴스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이 책,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흥미진진한 뉴스 사용설명서' 정말,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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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08-0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보통씨 책도 간만에 읽어야 하는데 좋은 책이 넘 많네요 ㅋㅋㅋ

readersu 2014-08-08 09:38   좋아요 0 | URL
히힛, 이제 답글 달아요.
책 사러 들어왔어요. 이 충동구매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은 책은 왜 자꾸 나오는지 몰라요(-.-)
아니, 왜 반값에 자꾸 팔아서....나를 충동질하는지....ㅋ
 
풍장의 교실
야마다 에이미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웬만하면 100자평을 쓰지 않으나, 백만년만에 만난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에 대해선 안 쓸 수가 없다. 좋다. 좋구나! 그녀의 문체, 스토리 그리고 소설 속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방식,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이 없다. 밑줄 긋고 또 긋고, 내 사춘기는 어땠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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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조금 어렸을 때, 박완서 선생님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란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 공감이 되지 않았다. 작품 속에 그려진 세계는 고리타분(!)했다. 나와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고, 나에게는 절대로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가 될 (만큼 나이를 먹을 줄은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때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닌데, 하고 지금 후회한다.(고 한들 뭔 상관이겠냐마는)

 

움움 근데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시작부터 삼천포^^;;

 

오늘 기사를 하나 읽었다. 아시아경제의 기사. 이 기사엔 내가 관심을 가진 작가들의 신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읽다 보니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두 남자작가이며 외국작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공통된 것. 위의 글을 읽었으니 짐작할 것이다. 나이듦? 늙음? 아니, 연륜이라고 해야 할까. (젊은작가는 괜찮은데) 늙은작가는 좀 웃기..지...만.. (요즘은 60대 중반도 나이가 들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지경이지만)... 그럼 대작가?! 아무튼.

 

    

 

첫번째, 스티븐 킹이다. 내가 대놓고 애정한다고 말하는 작가. 새 책이 나왔다. <닥터 슬립> 신간 알람 받은지 꽤 지났는데 아직도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만 있다. 두 권짜리라서 자꾸 밀리는 중. 두번째는 파울로 코엘료이다. 소개된 다섯 명의 작가 중에서 가장 늦게 알게 된 작가이지만 그의 끝없는 창작력, 좋다. 이번에 나온 <불륜>, 기대치가 높다. 세번째는 밀란 쿤테라이다. 올해 연세가 85세이다. 존경스럽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20대에 읽고 그의 전작을 사 모으던 때가 생각난다. 아직도 그의 신간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독자로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의미의 축제>, 역시 기대하고 있는 책. 네번째는 하루키이다. <여자가 없는 남자들>(일본판 제목)아직 예판도 하지 않는 책이지만 판권이 넘어왔으니 곧 나오겠지.

 

이 네 권의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살만큼 살아본 사람들이다. <샤이닝>의 주인공이 자라 중년이 되어 벌어지는 일을 그린 <닥터 슬립>, 결혼 10년 차의 30대 유부녀의 일탈을 그린 <불륜>, 자궁암으로 아내를 잃은 50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하루키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만 정보를 잘 모르겠고 세 명의 작가 모두 어느 정도의 연령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온다는 것. 작가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이다. 나는. 

 

한데 기사를 읽다가.. 문득, 이 작가들의 작품이 다 좋고, 기다려지고, 작가를 애정하고 잘 아는 독자들은 또 공감하며 읽겠지만 그들을 잘 모르는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함) 젊은 독자들도 과연 그럴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고리타분하다고, 할부지들(!)이 쓴 글이라고, 읽으면서 투덜대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나도 지금보다 어렸을 때 그러했으므로.;;;; (물론 난 그때 박완서 선생님을 애정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랬...다 ㅠㅠ) 그렇게 생각하자면 세상의 모든 나이 든 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해 다 그런 생각을 해야지 뜬금없이 ㅋ 우리 독자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이런 생각을 ……

 

아무튼 문학뉴스 읽다가 별 생각을 다하는 독자 1人 되겠다.

나의 오지랖을 이해하시라~ 애정하는 작가들이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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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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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일까? 곰곰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아서 소소한 이야길 적어두는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찾아보니 백가흠 작가의 강연회에서 사회를 본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시 만난 것은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을 통해서였다.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야구는 자주 보는 편이다. 야구에 대한 추억도 있고, 한때는 야구에 빠져 지냈던 적도 있었으며(물론 어느 스포츠나 다 그렇지만 경기보다는 선수에게 빠져서;;) 어느 정도의 룰을 알고 있기에 가장 쉽게 접근하기 좋았던 스포츠. 더구나 서효인 시인이 응원하는 팀은 한때 (그리고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응원하는 팀이기에 더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팀이라는 조직 속에서 몸과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러니 팀원의 편에 서서 상대편과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벤치클리어링은 경기의 일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팀의 동료들이 나를 위해 다이아몬드 복판으로 나와주었다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을 약속.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세상이라는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에 맞서는 타자가 되었을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나를 위해 그라운드로 벼락 같이 달려올 동료는 누구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시 쓰고 소설 쓰고 책 만들고 공부하는 그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들. 어지간히도 약하고 순한 사람들이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영상이 오버랩된다. 고개를 흔든다. 차라리 말을 마자. 그런 이유로,

밉보이지 않고 그래서 빈볼도 없고, 다툼도 없는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둥글둥글 살기로 한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에 둘러싸여 대거리를 주고받을 때, 내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갈게. 어깨를 걸칠게.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살아왔고, 우리 모두는 그걸 잘 안다. 나는 당신의 편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디든 마음으로, 혹은 정신으로, 끝내는 몸으로, 우리는 같은 편.

광포한 무리들에 맞선 지금, 우리는 벤치클리어링 하러 간다.

당신과 나의 동해 바다 같은 오지랖으로 펼쳐진 위아래 없는 연대 의식.

이를 줄여서 '벤치클리어링'이라고 부른다. 

_세상 앞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므로, <이게 다 야구때문이다> 에서

 

책을 펼쳐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서효인 시인의 문체와 이야기였다. 시인에게 시보다 산문이 더 좋다는 말은 실례가 되는 말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인들의 산문은 가끔 시보다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서효인 시인의 산문 역시 그랬다. (그의 시는 죄송하지만 많이 읽어보질 못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시인답지(!) 않은 감성이라고나 할까(아, 이것은 흉이 아닌데 흉으로 들리면 어쩌지;;). 어쩜 그렇게, 재미있게 글을 썼는지... 언제 다 넘겼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더랬다. 그러고선 시인의 시집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산문집이 또 언제 나올까, 기다렸는데…… 이렇게 예쁜 산문집이 짠~ 하고 나온 것이다. 

 

<잘 왔어 우리 딸>, 그래, 잘 왔어! 은재야!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서효인 시인은 트친이고, 그의 소식은 그가 트윗을 하는 만큼 알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귀여운 은재가 태어나기 전, 태어난 날, 태어난 후의 소식도 트윗으로 조금씩 듣고 있었는데... 그 모든 걸 떠나서 어쩌면 갑작스러운 일인, 평범하지만 않은 일에 대해 서효인 시인이 가지는 자세가 나는, 참, 좋았다. 

 

어제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런 문장을 찾았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추측되지 않은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냥 일어나고 만 그 일에 대해, 대책 없이 아파하는 것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을. <잘 왔어 우리 딸>은 그런 책이다. 그 사랑이 가득한, 그래서 더더 공감이 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사랑의 확신으로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를 확인하며 사랑을 본다. 속으로 천천히 발음한다.

 

우리 아이다.

우리 딸이다.

나는 아빠다.

 

조각 위에 또다른 조각이 쌓인다. 마음의 역사가 짧은 시간 꽤 많은 페이지를 넘긴다. 다음 페이지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멈추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어떤 곳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게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냥 일어날 뿐이었던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라고 말하는 것은 좀 건방진 말이겠다. 나는 역시 부모가 아니기에. 내 마음을 모두 내보여준다고 해도 부모의 마음에 비하면 손톱만큼의 사랑밖에 안 보일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안다. 그 손톱만큼의 사랑들이 모여 아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 사랑을 먹고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럽게 자란다는 것을.

 

나는 머릿속에 그렸던 그래프를 벗겨내 찢어버린다. 아이가 어디에 있든, 거기가 어디든, 유일하게 반짝이는 하나의 점이다. 무한한 면에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 별들에게는 상하와 고저가 없다. 그곳은 수학적 그래프의 면이 아니다. 상상 밖의 아득한 우주다. 거기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제 빛을 내고 있다.

 

서효인 시인은 프로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음악과 유머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마지막 열쇠'라고. <잘 왔어 우리 딸>은 읽는 내내 울컥울컥, 마음이 싸~해지다가 프로필 사진 속 은재마냥 자꾸만 미소 짓게 했다. 그는 유머 있는 아빠였다. 나는 그가 앞으로 그의 유머로, 그의 말대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이제 긍정적인 시인은 걱정이 많던 애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를 이젠 아이에게 불러준다. '생긴 건 다르고, 성격이 달라도 우리들은 친구죠. 사이좋은 친구죠.'

 

걱정 인형이 신나게 춤을 춘다

손에 쥔 안도감과 걱정이 스르르 사라지고

오롯한 기쁨만이 남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그가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일랑 걱정인형에게 맡기고.

앞으로 지속될 삶이 '유일한 희망이자, 여럿의 비운일지라도.' 그렇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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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시인의 시집이 나왔다. 눈에 들어온 시집이 몇 권 있다. 그리고 곧 있을 또 다른 애정 시인의 낭독회에서 받을 시집을 몇 권 골랐다. 친구들에게 선물해줄 시집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_안상학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 때 그 곳에서 뿌리 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현기증

      _김정기

 

눈을 감으면 보입니다.
이별이 아깝던 날 청춘의 눈물이
눈을 뜨면 안개망에 걸려온 저녁빛
숨지는 햇살에 당신이 가고 다시 오는
질긴 동아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산들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때
부서지는 뿌리에 매달린 나무들의 애달픈 사랑
때로는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풋풋했던 기억의 방에 들어가
드디어 당신을 놓아주었지요.
만지면 모두 하늘이 되는 땅 위의 형체도
이제 놓아버립니다.

막막한 길을 걷는 맑은 피가 균형 잃은 몸을
그래도 좋아하며 받쳐줍니다.
아득해서 더욱 가까운 시간의 눈빛을 마주 보며
이 자리가 황홀합니다.
나는 완벽한 흰빛이 되어 있습니다.

 

 

 

 

청명

     _전동균

 

오동꽃이 피었다 마당에

가슴뼈 같은 줄을 내걸고 이불을 펼쳐 널었다

 

먹고살 생각, 여자 생각에 뒤척이던 밤들이 놀라 두리번대다가 이내 공손해진다

 

모든 빛을 삼키고 내뿜는 자줏빛 불이 타오른다는 건

흙들이 술렁인다는 뜻,

이름 부를 신조차 없는 사람들 많아지고

살아서는 차마 못 잊힐 일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건데

 

헐렁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먼지를 터는

나 같은 놈도 손님이라고

타닥타닥 반갑게 튀어오르는 햇볕들

 

무슨 부끄러운 질문을 받은 양 마당은 일어섰다 누웠다 서성거린다

세상은 괜히 하늘 저켠에 닿을 듯 높아지고 높아져서

 

이사를 할까? 새장가를 들까?

망설이는 바람의 이파리들 사이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조용한 웃음이 몇

번져오고

 

 

 

어떤 경우

       _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내간체

     _안현미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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