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하는 시인의 시집이 나왔다. 눈에 들어온 시집이 몇 권 있다. 그리고 곧 있을 또 다른 애정 시인의 낭독회에서 받을 시집을 몇 권 골랐다. 친구들에게 선물해줄 시집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_안상학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 때 그 곳에서 뿌리 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현기증

      _김정기

 

눈을 감으면 보입니다.
이별이 아깝던 날 청춘의 눈물이
눈을 뜨면 안개망에 걸려온 저녁빛
숨지는 햇살에 당신이 가고 다시 오는
질긴 동아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산들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때
부서지는 뿌리에 매달린 나무들의 애달픈 사랑
때로는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풋풋했던 기억의 방에 들어가
드디어 당신을 놓아주었지요.
만지면 모두 하늘이 되는 땅 위의 형체도
이제 놓아버립니다.

막막한 길을 걷는 맑은 피가 균형 잃은 몸을
그래도 좋아하며 받쳐줍니다.
아득해서 더욱 가까운 시간의 눈빛을 마주 보며
이 자리가 황홀합니다.
나는 완벽한 흰빛이 되어 있습니다.

 

 

 

 

청명

     _전동균

 

오동꽃이 피었다 마당에

가슴뼈 같은 줄을 내걸고 이불을 펼쳐 널었다

 

먹고살 생각, 여자 생각에 뒤척이던 밤들이 놀라 두리번대다가 이내 공손해진다

 

모든 빛을 삼키고 내뿜는 자줏빛 불이 타오른다는 건

흙들이 술렁인다는 뜻,

이름 부를 신조차 없는 사람들 많아지고

살아서는 차마 못 잊힐 일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건데

 

헐렁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먼지를 터는

나 같은 놈도 손님이라고

타닥타닥 반갑게 튀어오르는 햇볕들

 

무슨 부끄러운 질문을 받은 양 마당은 일어섰다 누웠다 서성거린다

세상은 괜히 하늘 저켠에 닿을 듯 높아지고 높아져서

 

이사를 할까? 새장가를 들까?

망설이는 바람의 이파리들 사이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조용한 웃음이 몇

번져오고

 

 

 

어떤 경우

       _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내간체

     _안현미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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