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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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일까? 곰곰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아서 소소한 이야길 적어두는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찾아보니 백가흠 작가의 강연회에서 사회를 본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시 만난 것은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을 통해서였다.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야구는 자주 보는 편이다. 야구에 대한 추억도 있고, 한때는 야구에 빠져 지냈던 적도 있었으며(물론 어느 스포츠나 다 그렇지만 경기보다는 선수에게 빠져서;;) 어느 정도의 룰을 알고 있기에 가장 쉽게 접근하기 좋았던 스포츠. 더구나 서효인 시인이 응원하는 팀은 한때 (그리고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응원하는 팀이기에 더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팀이라는 조직 속에서 몸과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러니 팀원의 편에 서서 상대편과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벤치클리어링은 경기의 일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팀의 동료들이 나를 위해 다이아몬드 복판으로 나와주었다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을 약속.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세상이라는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에 맞서는 타자가 되었을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나를 위해 그라운드로 벼락 같이 달려올 동료는 누구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시 쓰고 소설 쓰고 책 만들고 공부하는 그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들. 어지간히도 약하고 순한 사람들이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영상이 오버랩된다. 고개를 흔든다. 차라리 말을 마자. 그런 이유로,

밉보이지 않고 그래서 빈볼도 없고, 다툼도 없는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둥글둥글 살기로 한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에 둘러싸여 대거리를 주고받을 때, 내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갈게. 어깨를 걸칠게.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살아왔고, 우리 모두는 그걸 잘 안다. 나는 당신의 편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디든 마음으로, 혹은 정신으로, 끝내는 몸으로, 우리는 같은 편.

광포한 무리들에 맞선 지금, 우리는 벤치클리어링 하러 간다.

당신과 나의 동해 바다 같은 오지랖으로 펼쳐진 위아래 없는 연대 의식.

이를 줄여서 '벤치클리어링'이라고 부른다. 

_세상 앞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므로, <이게 다 야구때문이다> 에서

 

책을 펼쳐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서효인 시인의 문체와 이야기였다. 시인에게 시보다 산문이 더 좋다는 말은 실례가 되는 말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인들의 산문은 가끔 시보다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서효인 시인의 산문 역시 그랬다. (그의 시는 죄송하지만 많이 읽어보질 못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시인답지(!) 않은 감성이라고나 할까(아, 이것은 흉이 아닌데 흉으로 들리면 어쩌지;;). 어쩜 그렇게, 재미있게 글을 썼는지... 언제 다 넘겼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더랬다. 그러고선 시인의 시집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산문집이 또 언제 나올까, 기다렸는데…… 이렇게 예쁜 산문집이 짠~ 하고 나온 것이다. 

 

<잘 왔어 우리 딸>, 그래, 잘 왔어! 은재야!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서효인 시인은 트친이고, 그의 소식은 그가 트윗을 하는 만큼 알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귀여운 은재가 태어나기 전, 태어난 날, 태어난 후의 소식도 트윗으로 조금씩 듣고 있었는데... 그 모든 걸 떠나서 어쩌면 갑작스러운 일인, 평범하지만 않은 일에 대해 서효인 시인이 가지는 자세가 나는, 참, 좋았다. 

 

어제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런 문장을 찾았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추측되지 않은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냥 일어나고 만 그 일에 대해, 대책 없이 아파하는 것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을. <잘 왔어 우리 딸>은 그런 책이다. 그 사랑이 가득한, 그래서 더더 공감이 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사랑의 확신으로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를 확인하며 사랑을 본다. 속으로 천천히 발음한다.

 

우리 아이다.

우리 딸이다.

나는 아빠다.

 

조각 위에 또다른 조각이 쌓인다. 마음의 역사가 짧은 시간 꽤 많은 페이지를 넘긴다. 다음 페이지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멈추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어떤 곳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게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냥 일어날 뿐이었던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라고 말하는 것은 좀 건방진 말이겠다. 나는 역시 부모가 아니기에. 내 마음을 모두 내보여준다고 해도 부모의 마음에 비하면 손톱만큼의 사랑밖에 안 보일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안다. 그 손톱만큼의 사랑들이 모여 아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 사랑을 먹고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럽게 자란다는 것을.

 

나는 머릿속에 그렸던 그래프를 벗겨내 찢어버린다. 아이가 어디에 있든, 거기가 어디든, 유일하게 반짝이는 하나의 점이다. 무한한 면에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 별들에게는 상하와 고저가 없다. 그곳은 수학적 그래프의 면이 아니다. 상상 밖의 아득한 우주다. 거기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제 빛을 내고 있다.

 

서효인 시인은 프로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음악과 유머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마지막 열쇠'라고. <잘 왔어 우리 딸>은 읽는 내내 울컥울컥, 마음이 싸~해지다가 프로필 사진 속 은재마냥 자꾸만 미소 짓게 했다. 그는 유머 있는 아빠였다. 나는 그가 앞으로 그의 유머로, 그의 말대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이제 긍정적인 시인은 걱정이 많던 애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를 이젠 아이에게 불러준다. '생긴 건 다르고, 성격이 달라도 우리들은 친구죠. 사이좋은 친구죠.'

 

걱정 인형이 신나게 춤을 춘다

손에 쥔 안도감과 걱정이 스르르 사라지고

오롯한 기쁨만이 남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그가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일랑 걱정인형에게 맡기고.

앞으로 지속될 삶이 '유일한 희망이자, 여럿의 비운일지라도.' 그렇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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