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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한 남자가 남의 집 담을 넘는다. 같이 작업(!)을 하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혼자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집은 덩그러니 넓기만 하고 낡고 어수선하며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휑한 정원이 둘러싸인 집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고 모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집안으로 잽싸게 들어간 남자는 작은 손전등으로 어둠을 밝히려고 하는 찰나에 천정의 샹들리에에서 불이 들어오며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한 남자 아이(여자 아이인가?)가 그를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여자 아이(남자 아이인가?)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고." 남자는 겉으론 억지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론 도망치고 싶었다. 허나 남자 아이(여자 아이인가?)가 비명을 지를까봐 그러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여자 아이(남자 아이인가?)가 남자에 관한 것을(이름은 물론이고 집안 사정까지!) 모두 알고 있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며 아버지로서 같이 살아주기를 명령(!) 을 한다. 왜?
자, 이 정도의 요약만으로도 이게 뭔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책을 처방해드립니다』는 처음부터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조차 잡히지 않게 만는다. 모두 20장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 중 1장의 「정원이야, 숲이야?」에서 마지막 부분,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칼비노인지 앨리스인지 혹은 룰루인지 모를 아이의 "경찰을 부를 건가요? 어서 하세요. 전화기는 거기 있어요."라는 글을 읽는 순간부터 19장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갈수록 오리무중, 미스터리, 판타지 속으로 직행한다. 마침내 마지막 20장에 들어서면 그제야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훔, 그래그래' 하면서 책을 덮지만, 막상 책을 내려 놓지는 못한다. 이런 상상력이라니!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상상력을 잃어버린다.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편견덩어리는 상상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그 책에 빠져 현실에서도 역할놀이를 하듯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실버 선장'이 될 수 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될 수 있으며, '돈키호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책은 읽고 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기승전결에 이르러 끝이 나면 더 이상 호기심과 상상력은 사라진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카를로 프라베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면서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이 작가는 그런 무덤덤한 독서가들에게 책으로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궁금증을 유발하여 생각을 유도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멋진 책을 던져주었다. 이 책으로 우리는 상상력이 발휘될 것이며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애를 쓰고 그리하여 우리의 편견이 탁! 깨부셔 질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편견의 덩어리에서 상상력을 뽑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처방받아 보길 바란다. 당신의 상상력이 살아날 지도 모른다! (주: 잦은 처방은 중독의 우려가 있을 수도 있음)
"이야기책은 사건을 간단하고 정리된 형태로 들려주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배우고, 도 우리 머릿속에 정리하는 걸 도와줘요. 어린애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하는 건 자기가 그 정보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머릿속에 잘 정리해놓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요…… 우리 어른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죠. 좋은 책이나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하잖아요." p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