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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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았던 정한아가 첫 소설집을 펴냈다. 전작의 따뜻함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책을 받자마자 내리 읽었다.  표제작인 「나를 위해 웃다」를 시작으로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엔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따뜻함과 긍정적인 마인드가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특히 표제작인 「나를 웃다」에서 ''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독특하면서도 꽤 매력적인 단편이었다.  

불행해보이지만 전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생, 독자인 나로서는 읽으면서 내내 어이없는 일들에 화가 나, 너무나 무덤덤하게 대처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휴, 정말'하곤 혼자 분노했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체념과 무관심이 마지막에 "이제 엄마도 혼자가 아니었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아,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들 모녀가 동시에 느꼈던 "편안함"을 나도 같이 느끼고 말았다.  

이러한, 아프고 힘들었겠으나 앞으론 편안해지고 행복해질 거라는 자기 암시의 긍적적인 글들은 다른 단편들에도 나타난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버려지다시피한 ''는 '온종일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길거리를 내려다보며'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그 아버진 ''의 존재를 보류한 채 새 가정을 이룬다. 유리 조각으로 아버지의 등을 찔러 집을 나온 후 찾아든 사창가에서 ''는 나를 찾는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지만 이별한 종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 것을 믿으며 과거의 끈을 놓아버린다.(「아프리카」), 불구에 변변한 직업도 없는 아버지 대신 직장을 다니던 노곤한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말없이 잡아주며 '품위'를 유지하던 아버지, '품위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아버지는 옳았다.'고 말하던 딸의 생각에서 가정의 지키기 위해 엄마를 감싸 안아주는 아버지로 인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삶에서는 그 어떤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댄스댄스」)    

그 외,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던 ''는 남자의 아내와 아이가 찾아오는 주말엔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은 늘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단다. 나는 항상 내가 절름발이처럼 느껴졌어. 그런데 기억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이해가 돼. 구겨져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까지" 라고 말하며 "나는 구름처럼 높은 곳에서 나를 바라본단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존재가 가늘어지는 진짜 외로움을 느끼며 ''는 남자와 이별을 준비한다.(「휴일의 음악」)   

 이렇듯 과정으로 보면 「휴일의 음악」에서 할머니가 느끼듯이 '삶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듯 해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결국 인생이란 나아갈수록 이해가 되고, 그 이해로 인해 「나를 위해 웃다」의 모녀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정한아의 소설들은  버려지거나, 혹은 이별하거나 불행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씩씩한 의지가 느껴져서 좋다. 더불어 그녀가 표현하는 인간관계의 소통 방식은 무덤덤하고 아픔을 내보이지 않으면서 그 아픔을 전달하기에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성숙해지며 깊이가 보인다. 그래서 정한아만의 따뜻한 문체와 함께 바라보는 삶의 긍적적인 태도는 '아무런 목적이나 가치가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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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엘리베이터 살림 펀픽션 1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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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소설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코미디? 추리? 공포? 내가 봐서는 이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어느 장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도 없다. 눈을 떠 보니 엘리베이터 안, 이건 공포다. 누구나 눈 떠보니 포근한 침대 속이 아니고 엘리베이터 안이라면 공포감부터 들 것이다. 문득, 눈 뜨니 어느 방 안에 쓰러져 있던 영화 <쏘우>가 생각난다.(아, 그러나 그 정도의 호러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이건 풀어야 할 숙제이므로 추리다. 더구나 모르는 남자 둘과 여자까지 있다. 이 장면에선 영화 <큐브>가 생각난다.(물론 공포보다 밀실이라는 점으로 인해) 근데 웬 코미디? 앞의 이야기들하고 심하게 다른 장르인데… 이유는 이렇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주고받는 대화가 가관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나가기 위해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과정에서 이들은 온갖 단어를 다 댄다. ‘사람 살려’는 기본이고, ‘불이야!’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도망쳐!’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호랑이’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하긴 마키하라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호랑이라니.  

아무튼, 모두 네 명의 화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풀어 놓는 이 어이없는 상황극은 처음엔 공포로 시작되다가 이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기가 막혀서 참내, 하다 보니 이건 또 뭔 일이람! 그들의 비밀이 장난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고 하는 이야기인가 머리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죽는다. 헉!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마지막이다. 반전이다. “무엇을 예상하든 100% 빗나갈 것이다”라고 아마존재팬 독자가 말했다는데 맞다!  

어쨌든, 결과는 결과이고 이 소설은 그야말로 악몽이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나래도 이게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꿈이라면 깨고 싶고, 시간이라면 되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뭐겠는가? 

책을 덮으면서 생각해보니 군데군데 힌트들이 있었다. 추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눈치를 챌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빠져 있다가 아! 하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느끼는 스토리의 재미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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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설에 빠지다 - 금오신화에서 호질까지 맛있게 읽기
조혜란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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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도 우리나라 고전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서포 김만중의『구운몽』을 산 적이 있었다. 지금은 왜 뜬금없이 『구운몽』을 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내 구매 습관으로 봐서는 그 당시 기사나 칼럼에서 『구운몽』과 관련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고전의 문체나 옛 글의 어려움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스토리만 듣고 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겨우 두어 장 넘기고 아직도 책꽂이 구석에서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테니. 그에 비하면 이 책에도 짧게 소개가 되지만 5권짜리 『옥루몽』은 꽤 흥미롭게 읽은 셈이다. 요즘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십대 중반 아이들의 판타스틱한 무술 실력과 철저한 권선징악, 그리고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다섯 선녀들. 한마디로 스펙타클하면서 문체가 주는 즐거움이 나름 재미있어 즐겁게 읽었던 거다. 그러고선 실로 오랜만에 읽은 고전되겠다.  

『옛 소설에 빠지다』, 소설 좋아하는 나로선 ‘옛 소설‘이라는 제목에 ’혹‘해버렸다. 옛날 소설들은 과연 어떨까? 현대의 소설처럼 흥미롭고 재미있을까? 궁금증이 더했다. 책을 받자마자 첫 이야기인「이생규장전」을 읽으면서 나는 제목 그대로 옛 소설에 빠지고 말았다. 귀신과 사통하는 소설이라니, 현대로 따지면 공포 스릴러 소설 정도 되겠지만 고전에서 보는 귀신은 아름다울 뿐이다. 얼마나 남편이 걱정되었으면 죽어서 나타났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진실된 남녀의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오싹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작품은 「강도몽유록」이었다.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목숨을 잃은 여인네들의 통곡에 가까운 한은 그야말로 으스스했다. 역사적 사건을 두고 도망가고 제 한 몸 건사하기에 바빴던 관료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여인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꿈이라는 걸 빌어 이런 이야길 했을까 싶다. 

또 「오유란전」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면서 코믹하고 유쾌했고, 「적성의전」이 보여준 형제의 선악구조와 인과응보는 종교적인 색채가 들어갔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었다.  

이렇듯 남녀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전쟁, 그 시대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양반들의 행태와 당대의 날카로운 풍자까지 모두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옛 소설에 빠지다』는 현실적인 이야길 다룬 것은 물론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저자가 독자들의 구미에 맞게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놓아 훨씬 읽어내기가 수월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비슷한 다른 이야기들을 읽어보도록 유도함으로써 고전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여주고 궁금증을 심어주었다. 

책을 덮으면서 우리가 고전을 멀리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건 아마도 어렵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려운 고전이라도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문체를 사용한다면 베스트셀러로도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아무튼, 간만에 우리의 고전에 푹 빠져 보낸 며칠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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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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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남의 집 담을 넘는다. 같이 작업(!)을 하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혼자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집은 덩그러니 넓기만 하고 낡고 어수선하며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휑한 정원이 둘러싸인 집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고 모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집안으로 잽싸게 들어간 남자는 작은 손전등으로 어둠을 밝히려고 하는 찰나에 천정의 샹들리에에서 불이 들어오며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한 남자 아이(여자 아이인가?)가 그를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여자 아이(남자 아이인가?)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고." 남자는 겉으론 억지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론 도망치고 싶었다. 허나 남자 아이(여자 아이인가?)가 비명을 지를까봐 그러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여자 아이(남자 아이인가?)가 남자에 관한 것을(이름은 물론이고 집안 사정까지!)  모두 알고 있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며 아버지로서 같이 살아주기를 명령(!) 을 한다. 왜? 

자, 이 정도의 요약만으로도 이게 뭔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책을 처방해드립니다』는 처음부터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조차 잡히지 않게 만는다. 모두 20장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 중 1장의 「정원이야, 숲이야?」에서 마지막 부분,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칼비노인지 앨리스인지 혹은 룰루인지 모를 아이의 "경찰을 부를 건가요? 어서 하세요. 전화기는 거기 있어요."라는 글을 읽는 순간부터 19장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갈수록 오리무중, 미스터리, 판타지 속으로 직행한다. 마침내 마지막 20장에 들어서면 그제야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훔, 그래그래' 하면서 책을 덮지만, 막상 책을 내려 놓지는 못한다. 이런 상상력이라니!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상상력을 잃어버린다.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편견덩어리는 상상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그 책에 빠져 현실에서도 역할놀이를 하듯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실버 선장'이 될 수 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될 수 있으며, '돈키호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책은 읽고 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기승전결에 이르러 끝이 나면 더 이상 호기심과 상상력은 사라진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카를로 프라베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면서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이 작가는 그런 무덤덤한 독서가들에게 책으로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궁금증을 유발하여 생각을 유도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멋진 책을 던져주었다. 이 책으로 우리는 상상력이 발휘될 것이며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애를 쓰고 그리하여 우리의 편견이 탁! 깨부셔 질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편견의 덩어리에서 상상력을 뽑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처방받아 보길 바란다. 당신의 상상력이 살아날 지도 모른다! (주: 잦은 처방은 중독의 우려가 있을 수도 있음)

"이야기책은 사건을 간단하고 정리된 형태로 들려주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배우고, 도 우리 머릿속에 정리하는 걸 도와줘요. 어린애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하는 건 자기가 그 정보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머릿속에 잘 정리해놓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요…… 우리 어른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죠. 좋은 책이나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하잖아요."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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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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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었던 에밀 졸라의 책을 읽었다. 문학소녀가 아니었던 나로서는 이미 유명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 작가의 책을 이제야 읽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드디어 읽었다는 것이 어딘가? 하는 자위를 스스로 해본다. 에밀 졸라에 대해선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온 드라마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드라마로 인상주의 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에밀 졸라와 세잔의 관계가 들어간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책과 에밀 졸라라는 작가까지 머릿속에 넣어 두게 되었다.(그렇다. 넣어두기만 하고 그의 책 『작품』은 책꽂이에 그대로 얌전히 꽂혀 있다.) 그래서 이 책 『테레즈 라캥』이 에밀 졸라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제서야!) 왜 그렇게 읽어보고 싶어 했는지!! 내용도 몰랐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도 귓등으로 넘기고, 오로지 에밀 졸라의 소설이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읽었던 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보바리 부인』의 현대판이라고 일컫는 그래픽 노블 『마담 보베리』를 읽고 있었다. 불륜을 저지른다는 면에선『테레즈 라캥』과 플로베르의 책이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그과정과 결과는 다르다. 둘 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잘못에 대한 댓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에밀 졸라가 서문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고 밝혔듯이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넘어서 그는 자연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뿐이다”라는 말로 로랑과 테레즈를 '인간이라는 동물'로 치부한다. 플로베르의 사실주의에도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테레즈 라캥』을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알만하지만 이 책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억울해 서문까지 작성하여 사과를 요구한 에밀 졸라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책을 읽을 때 페이지 한장한장을 넘기기 아쉬운 책들이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이 하나하나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나는 이 책 『테레즈 라캥』을 읽으면서 느꼈다. 사실, 줄거리를 말하자면 에밀 졸라가 살았던 그 시대에서 현재로 오면서 수없이 많이 보고 읽고 들었을 스토리다. 소설뿐만 아니라 어느 영화에서도 본듯한 설정과 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가 왜 그토록 책 읽는 기쁨을 주었을까? 그게 작가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밀 졸라가 내보이는 문체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내면에 깔려있는 욕구와 본능,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가서 결국엔 자멸하고 마는 심리 과정을 너무나 논리있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며 도대체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긴장감까지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동안 인간의 잘못된 욕망에 대한, 그 댓가에 대한 가장 공포스러운 소설로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 떠오를 것 같다. 이젠 그의 전작을 읽어볼 때이다.   

 

 

덧, 이 놀라운 책을 읽고 나서  
매번 명작이라 일컫는 고전소설들을 읽으면 그 소설들이 얼마나 위대한 소설인가를 깨닫게 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읽히고 회자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다. 어렵다고 피하고, 두껍다고 피하고, 그러나 나도 이젠 정말! 고전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건가? 나도 이젠 그런 작품들을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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