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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이름만 들었던 에밀 졸라의 책을 읽었다. 문학소녀가 아니었던 나로서는 이미 유명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 작가의 책을 이제야 읽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드디어 읽었다는 것이 어딘가? 하는 자위를 스스로 해본다. 에밀 졸라에 대해선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온 드라마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드라마로 인상주의 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에밀 졸라와 세잔의 관계가 들어간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책과 에밀 졸라라는 작가까지 머릿속에 넣어 두게 되었다.(그렇다. 넣어두기만 하고 그의 책 『작품』은 책꽂이에 그대로 얌전히 꽂혀 있다.) 그래서 이 책 『테레즈 라캥』이 에밀 졸라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제서야!) 왜 그렇게 읽어보고 싶어 했는지!! 내용도 몰랐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도 귓등으로 넘기고, 오로지 에밀 졸라의 소설이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읽었던 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보바리 부인』의 현대판이라고 일컫는 그래픽 노블 『마담 보베리』를 읽고 있었다. 불륜을 저지른다는 면에선『테레즈 라캥』과 플로베르의 책이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그과정과 결과는 다르다. 둘 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잘못에 대한 댓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에밀 졸라가 서문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고 밝혔듯이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넘어서 그는 자연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뿐이다”라는 말로 로랑과 테레즈를 '인간이라는 동물'로 치부한다. 플로베르의 사실주의에도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테레즈 라캥』을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알만하지만 이 책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억울해 서문까지 작성하여 사과를 요구한 에밀 졸라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책을 읽을 때 페이지 한장한장을 넘기기 아쉬운 책들이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이 하나하나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나는 이 책 『테레즈 라캥』을 읽으면서 느꼈다. 사실, 줄거리를 말하자면 에밀 졸라가 살았던 그 시대에서 현재로 오면서 수없이 많이 보고 읽고 들었을 스토리다. 소설뿐만 아니라 어느 영화에서도 본듯한 설정과 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가 왜 그토록 책 읽는 기쁨을 주었을까? 그게 작가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밀 졸라가 내보이는 문체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내면에 깔려있는 욕구와 본능,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가서 결국엔 자멸하고 마는 심리 과정을 너무나 논리있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며 도대체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긴장감까지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동안 인간의 잘못된 욕망에 대한, 그 댓가에 대한 가장 공포스러운 소설로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 떠오를 것 같다. 이젠 그의 전작을 읽어볼 때이다.
덧, 이 놀라운 책을 읽고 나서
매번 명작이라 일컫는 고전소설들을 읽으면 그 소설들이 얼마나 위대한 소설인가를 깨닫게 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읽히고 회자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다. 어렵다고 피하고, 두껍다고 피하고, 그러나 나도 이젠 정말! 고전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건가? 나도 이젠 그런 작품들을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