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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평점 :
언젠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지하철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한참 읽다가도 아니다. 몇 줄 읽기도 전에 나의 지극히 평범함으론 제대도 상상도 안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던 적이 있었다. 이것이 '무라카미 류'하면 생각나는 웃긴 추억이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가 2004년 아쿠타가와 수상작으로 적극적으로 밀었던 소설이 바로 "뱀에게 피어싱"이었다니 어느정도 이 소설이 기이할 것이라는 예감과 기대가 동시에 되었다.
사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의 기이함, 성적가학성, 특이함보단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과 함께 주인공들의 특이한 취미와 생활방식, 사랑관계가 훨씬 수용적이며, 단순하며,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표면으로 드러난 주인공들의 삶은 어두우나 그들에 대한 느낌은 경쾌하다고 할까.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감정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루이, 아마, 시바.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기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세사람이 보통인으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가학적 취미, 행동들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소재는 다분히 가학적이고 생소하며 특이하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겉내용일뿐 이 세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들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이를 향한 순수한 아마의 사랑, 표현은 가학적이나 냉정하고 정확하게 루이를 사랑해주는 시바. 이 둘 사이에 있는 루이. 분명 루이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 사랑을 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소유욕이 강한 루이에게 있어 아마와 시바의 감정과 상태는 그다지 문제가 되어 보이진 않는다.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아마와 시바는 루이의 등에 새겨진 용과 기린의 문신이 완성되는 날 이미 그 둘 모두가 루이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루이의 사랑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현실에서 아마가 죽어 없어졌으나 루이의 등에 용으로 남아있고 어느날 시바가 그녀의 곁을 떠나더라도 기린은 루이의 등에 남아 있을 것이기에 루이는 불안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루이에게 있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만이 루이가 살고있는 세상이다. 이전의 세상엔 관심도 없으며 자신이 느끼지, 알지 못했던 세상일과 그 속에 있던 존재들, 가치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마의 이름과 아르바이트 장소를 몰랐던 것처럼, 아마를 죽인 범인이 시바일지도 모르는 의심이 피어나지만 결국 묻어버리는 것처럼, 아마를 잃고서도 살아있는 기린 즉 시바의 이름조차도 물어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잊어버리지 말자! 이야기는 루이, 아마, 시바의 사랑이고 루이의 성숙과정이라는 것을. 가학적인 소재와 묘사들 속에서 이들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서 내 자신은 뿌듯하고 기뻤으니. 이 소설은 연애이야기가 아니다라고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타인들 마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넒음도 이 세사람의 특이함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으니 이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