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안중식 옮김 / 지식여행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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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의 소년 사쿠타로가 소녀 아키를 만나다. 친구에서 연인까지 겨우 2년의 세월이다.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남편과 아내가 되고, 자식의 부모가 되고, 함께 늙어갈 수 없었던 것은 아키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영원히...

확신했던 존재의 소멸...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까. 열일곱의 소년에게도 마찬가지며 누구에게도. 실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마치 저 하늘, 저 공기, 저 바다, 저 나무 곁에,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혼이 머물기 때문일까. 같이 죽어지면 세상 속 사람들은 모르는 저세상에서 가장 원했던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것일까. 하지만 만난다고 해서 세상에서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기에 그립고, 괴롭고, 슬펐던 모든 감정들이 녹아 없어지는지. 그것 마저도 화가난다.

화가나는 것은 그저 사람이 죽어 없어져서가 아니다. 이미 그 사람을 좋아했기에 화가나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 동안 한번도 잊지 않겠지만, 그것이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아마도 생애의 가장 긴 사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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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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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지하철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한참 읽다가도 아니다. 몇 줄 읽기도 전에 나의 지극히 평범함으론 제대도 상상도 안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던 적이 있었다. 이것이 '무라카미 류'하면 생각나는 웃긴 추억이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가 2004년 아쿠타가와 수상작으로 적극적으로 밀었던 소설이 바로 "뱀에게 피어싱"이었다니 어느정도 이 소설이 기이할 것이라는 예감과 기대가 동시에 되었다.

사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의 기이함, 성적가학성, 특이함보단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과 함께 주인공들의 특이한 취미와 생활방식, 사랑관계가 훨씬 수용적이며, 단순하며,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표면으로 드러난 주인공들의 삶은 어두우나 그들에 대한 느낌은 경쾌하다고 할까.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감정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루이, 아마, 시바.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기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세사람이 보통인으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가학적 취미, 행동들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소재는 다분히 가학적이고 생소하며 특이하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겉내용일뿐 이 세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들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이를 향한 순수한 아마의 사랑, 표현은 가학적이나 냉정하고 정확하게 루이를 사랑해주는 시바. 이 둘 사이에 있는 루이. 분명 루이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 사랑을 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소유욕이 강한 루이에게 있어 아마와 시바의 감정과 상태는 그다지 문제가 되어 보이진 않는다.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아마와 시바는 루이의 등에 새겨진 용과 기린의 문신이 완성되는 날 이미 그 둘 모두가 루이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루이의 사랑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현실에서 아마가 죽어 없어졌으나 루이의 등에 용으로 남아있고 어느날 시바가 그녀의 곁을 떠나더라도 기린은 루이의 등에 남아 있을 것이기에 루이는 불안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루이에게 있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만이 루이가 살고있는 세상이다. 이전의 세상엔 관심도 없으며 자신이 느끼지, 알지 못했던 세상일과 그 속에 있던 존재들, 가치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마의 이름과 아르바이트 장소를 몰랐던 것처럼, 아마를 죽인 범인이 시바일지도 모르는 의심이 피어나지만 결국 묻어버리는 것처럼, 아마를 잃고서도 살아있는 기린 즉 시바의 이름조차도 물어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잊어버리지 말자! 이야기는 루이, 아마, 시바의 사랑이고 루이의 성숙과정이라는 것을. 가학적인 소재와 묘사들 속에서 이들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서 내 자신은 뿌듯하고 기뻤으니. 이 소설은 연애이야기가 아니다라고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타인들 마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넒음도 이 세사람의 특이함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으니 이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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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dance,1910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개에게 물어뜯긴 귀를 가진 아버지

어머니는 사흘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지진이 난 간사이 지방에 가고 없다. 요시야는 신의 아들로 키워진 자신의 신과 생물학적 아버지 찾기 속에서 일상 생활의 공백감과 어둠을 뚫고, 조용한 묵시록과도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찾는다. 그리고 오래 전에 신을 버렸던 그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을 춘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데........... .

요시야는 안경을 벗어 케이스에 접어 넣었다.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진 않군, 하고 요시야는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 요시야는 눈을 감고 하얀 달빛을 피부로 느끼면서 혼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기분에 딱 맞는 멋진 음악을 생각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풀의 흔들림과 구름의 흐름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순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는 기척을 느꼈다. 누군가의 시야 속에 있는 자신을, 요시야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이 , 피부가, 뼈가 그것을 감지해 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누구든 간에, 보고 싶으면 실컷 봐라.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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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스판 -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Z.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옮김 / 삼인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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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엔 과연 누가 있을 수 있을까. 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 세계는 거대한 게임판으로 보일까. 이 세계를 거대한 게임판으로 보고 있는 존재가 신 이외에도 세상 속에 존재하니 그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시각으로 세상판을 직시한다면 세상은 유럽, 일본, 유라시아, 중국 등의 말들이 미국의 손놀림으로 조정되는 체스판에 불과하다. 작가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예비 지도자들에게 '세계 체스판'위에서 펼쳐지는 게임에서 그들이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조련사의 책임을 떠맡은 듯 오만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체스판의 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두 차례의 대전을 끝으로 세계의 우두머리로 자타공인된 미국. 언제는 겸손한 척, 때론 무관심한 척, 또 도덕적인 양심 국가인척, 다양한 터치으로 세계를 주물러 왔지만 결국 미국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래에까지 오로지 일관된 정책만을 추구해 왔으며 추구할 것이다. 자국의 경제적 번영과 막강무력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지역적 판세가 바뀌고 국제사회의 입지도에 변화가 생겨도 미국의 위치는 불변, 항상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것에는 그들만의 국제구도 편성에 확고한 고집과 치밀한 계획, 밀어부치기식 행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의 땅, 바다를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항상 재배치가 가능한 그들의 완고한 게임 시뮬레이션이 있기에 미국의 국제사회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 같다. 하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그들의 얘기가 정서적으로 호감이 가지도 않고 벨이 꼬일 정도로 아니꼬아도 어쩔 수 없이 우린 그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최소한 그들의 검은 속은 알고 있다는 논리적인 욕을 언제든지 그들에게 뱉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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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보 2009-03-1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작 <미국의 마지막 기회>도 추천드립니다.
여전히 오만하게 자기들이 세계 리더라고 사명감을 느끼지만
살짝 겸손해진 감도 있습니다.
 
멸치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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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은 말했었다. "객관적으로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리라.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어린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난 전혜린의 이런 따뜻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나에게 있어 유년기 그리고 그 이후의 짧은 기간이 나의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에 올인! 내가 좀더 글발이 된다면 나의 이런 기억들을 글로 써내려가겠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그런 재주가 없다. 그래서 더욱 '멸치'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멸치'속의 '나'가 부럽다. '나'의 어린시절이 샘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어구와 필체로 잔뜩 써져 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어린 시절은 작가가 구사한 미사여구와는 전혀 딴판으로 우울 그 자체이다. 집을 나간버린 어머니, 방황하는 아버지, 어니니가 집을 나가버린 이유일지도 모르는 외삼촌 달구,  이 모든 것들은 결코 '나'의 인생에 한치의 빛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의 인생의 먹구름일 뿐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외의 존재들은 인간오염에서 '나'를 구제해주며 '나'의 얘기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나를 만들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져보길 바란다. 나의 구성성분은 무엇인지 과자봉지 뒤의 성분 퍼센트처럼 명확하진 않더라도 나의 모습을 만들어준 것엔 분명 그 차지함에 있어 순위는 있을 것이다. 제발 그 순위의 맨 위를 차지하는 것이 개인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인지 아님 그 사람들한테 한껏 상처 받은 후 그 상처를 치료해준 인간외 것인지는 누구나 다르겠지만 내가 저 깊은 곳에서 원하는 이름들이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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