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은 황금과 노예를 찾았다. 그 누구라도 황금과 노예를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노예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념상도 동시에 가지고 싶어했다. 그들은 지혜와 활력에 넘치며, 권력마저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문명의 두가지 측면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예와 기념상을 동시에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Naipau, V.S. A Ben in the River(New York, Vintage Books 1980) p. 17, Cohen 번역서 pp. 288~28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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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산해, 2003
Discovering History in China,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코헨의 이 책은 1970년대 이전 미국의 중국 연구자들 -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의 중국에 대한 연구자들 - 이 가졌던 연구경향을 분석하여 비판하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연구경향을 요약하고 있다.

 

코헨은 기존의 접근법을 세가지로 대별하고 있다. 그것은 충격-반응 접근법, 근대화 접근법, 제국주의 접근법이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19세기 중국사를 서양의 충격에 따른 중국의 반응으로만 해석하는 방법이다. 근대화 접근법은 전통시대와 근대로 긴 중국의 역사를 간단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방식이다. 제국주의 접근법은 근대화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 접근법이다. 세가지 접근법 모두 서양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중국 내부의 발전이나 갈등구조를 등한시한다. 세가지 접근법은 모두 무엇이 중국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촉진·방해했느냐는 목적론적 접근법에 함몰되어 실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비목적론적 질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연구성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매우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부분은 제3장 초반의 제임스 펙에 의한 기존 중국전문가 비판과 반비판, 이어진 반반비판 그리고 저자의 촌평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야기된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반성 또는 증오가 중국학 학계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980년대 남한 대학가를 휩쓴 지적 광풍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주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중동 지역 연구에 있어  서구의 편견을 잘 보여준 것처럼 폴 코헨은 오리엔탈리즘의 폐해가 중국 연구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인문학 관련 책으로 치부될 수 없는 사회과학자에게도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충격-반응 접근법

충격-반응 접근법이 야기한 세가지 중국 연구의 왜곡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에 관계가 없는 사건을 과소평가한다.
둘째, 서양과 관계된 사건을 과대평가한다.
셋째, 중국인의 자각적 반응을 중시하므로 사상적, 문화적, 심리적 차원에서 문제를 파악하는 반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검토를 게을리 한다. 

코헨이 충격-반응 접근법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제안한 것은 중국을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주변영역(outermost zone)
항구, 무기공장, 조선소, 왕타오. 총리아문, 해관, 기독교 개종자, 유학생, 외교관
중간영역(intermediate zone)
태평천국, 동치중흥, 자강운동, 관료기구, 조정에 있어서의 정치적 소요, 배외주의, 도시와 농촌 사이의 사회적, 정치적 긴장
중핵영역(innermost zone)
언어, 문자, 사상, 종교, 미의식을 표현하는 표현양식, 중국 농민들의 생활 스타일, 관습, 제도

주변영역은 충격에 대한 반응이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곳이고 중핵영역은 충격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다. 19세기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변영역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중간영역이다. 중간영역은 학자들이 많이 연구한 분야인데 충격-반응론자들은 이것을 마치 주변영역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중간영역의 변화는 비록 서구의 충격과 관련은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오랜 역사적 전통이나 깊은 사회적, 정치적 갈등관계를 통해 보았을 때 더 잘 이해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코헨이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들은 바로 이러한 중국 내부의 긴장관계 속에서 19세기 중반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는 스타일의 것들이다.


근대화 접근법

19세기 서양인들의 중국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야만이며 서양은 문명화되어 있다. 둘째, 중국은 정지되어 있고, 서양은 역동적이다. 셋째, 중국은 자생적으로 변혁을 일으킬 수 없으며 바깥으로부터의 힘에 의한 충격이 필요하다. 넷째, 바깥으로부터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서양뿐이다. 다섯째, 서양 침략의 결과로서 중국의 전통사회는 서양식으로 치장한 새로운 근대 중국에게 길을 양보하게 된다.
코헨은 이를 세가지 명제로 다시 요약한다. 제1명제는 잠자고 있는 중국은 외부로부터 거대한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다이며 제2명제는 근대 서양만이 그와 같은 충격을 중국에 가할 수 있다이며 마지막으로 제3명제는 일단 충격이 가해져서 움직이게 되면 그 과정은 중국문화를 서양의 이미지에 맞아떨어지게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대 시작된 새로운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구들의 예를 들 수 있다.
1. 중국혁명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서양의 침략에 앞서 중국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2. 도시의 급진적 지식인에 의한 혁명은 실패했지만 농촌의 가난한 농민과 함께한 혁명은 성공했다. 농민들이 공유한 전통적 혁명은 일찍이 존재했던 인간이 영위해야 할 삶의 방식을 다시금 회복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를 잘 활용했다. 전통은 혁명의 장애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촉진하고 혁명에 활력을 부여하며 혁명을 정통화하기 위한 재료의 저장고이기도 했다.(프리드만 Freedman, Edward. Backward Toward Revolution : The Chinese Revolutionary Party(Berkeley :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4))
3. 중국은 일본에 비해 덜하긴 하지만 제3세계 전체로 보아서는 근대화에 성공했다. 성공을 가능케 했던 요인은 중국의 전통 내에서 찾아진다. 이상사회를 향한 유학자들의 고뇌는 서양의 대두에 의해 해방되었다. 중국의 혁명이란 중국 전통사회의 파멸이 아니라 전통사회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멧거 Metzger, Thomas A. Escape from Predicament : Neo-Confucianism and China's Evolving Political Culture(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7))
4. 중국의 전통경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멈춰버린 고도균형함정에 빠져 있었다. 서양의 공헌은 중국을 개방시킴으로써 고도균형상태를 완화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균형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엘빈 Elvin, Mark. The Pattern of Chinese Past : A Social and Economic Interpretation(Stanford, Calif.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3))

 

전통과 근대성의 대조가 야기한 세가지 편견이 있다.

1) 전통과 근대성은 양립불가능하다는 편견.
전통사회가 잠재적으로 근대성을 가질 수 있고 근대사회가 전통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2) 헥스터(J. H. Hexter)에 따르면 역사학자들에게는 역사 에너지 불변의 법칙의 편견이 있다. 헥스터는 16세기 영국에서 세속활동과 종교활동의 사례를 통해 16세기에 두 활동 모두 격렬해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를 근대성의 문제에 적용하면 근대화의 에너지가 커지면 전통의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편견이 나타난다.(Hexter, J. H. Reappraisals in History (New York : Harper and Row, 1963) )
팁스(Dean Tipps)는 부분적 선택적 근대화가 오히려 전통사회를 강화하는데 이용될 수 있음을 지적했고 프리드만과 멧거는 혁명적 변화의 실질적 증가는 전통적 가치와의 관련성이 강해지는 것과 나란히 진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Tipps, Dean C. "Modernization Theory and Comparative Study of Societies : A Critical Perspective",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15(March 1973), 199-226)

 

제국주의 접근법
제국주의론은 근대화론이 서양의 충격이 가져온 근대화가 축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제국주의는 중국의 발전을 방해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론이나 서양 경제력의 중국 침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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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역법(差役法) vs. 모역법(募役法)

북송대 왕안석의 개혁정책에서 모역법은 농민 상층계급의 요역(?役) 부담을 합리화하고 경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관리로부터의 착취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왕안석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신법당은 이후 구법당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는데 이때 구법당은 모역법을 폐지하고 기존의 차역법을 재도입했다.

이후 남송, 원을 거치면서 대체로 모역법은 정착하지 못하고 기존의 신역(身役)과 현물납부를 결합한 방식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명대의 이갑제(里甲制)와 지주의 확대

명태조의 이갑제는 향촌 농민의 상층계급을 甲과 里로 편성하여 요역을 부담시킨 것이다. 이때 요역은 조세징수, 향촌치안, 호적관리 및 물자공납의 정역(正役)과 기타 잡역(雜役)을 의미한다. 이갑의 요역 부담은 많은 향촌의 상층 농민을 파산시켰다. 이에 비해 관료와 향신집단은 요역을 면제받고 있었다.

결국 명 중기 이후 특권층인 관료와 향신 집단에 의해 격심한 토지겸병이 일어나고 지주소작제가 확대되었다. 결국 이갑제는 이갑이 감소함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
명말 청초에 이르면 일조편법이 시행되고 지정은제도로 변화하면서 요역을 신역과 현물납부를 결합하여 제공하는 제도는 사라지고 은으로 일괄 납부하는 근대적 제도가 탄생하였다. (미야자키 p. 331)

 

징세방법 vs. 징세액 수준

명태조의 이갑제는 사실 왕안석의 모역법에 의해 폐기되었던 차역법(차역법)에 다름 아니다. 왜 명태조가 모역법이 아닌 차역법을 채택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건 관료와 향신집단은 차역법에 따른 부농의 몰락을 이용해 소작지를 확대해나갔다는 점에서 징세방법이 토지소유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트만의 경우에도 명대 초에 시도된 대토지소유의 해체가 결국 다시 역전되어 대토지소유가 재등장하는 현상을 언급하고 있는데(이스트만 p. 108) 이스트만의 경우 차역제가 아니라 영락제(15세기)의 재정지출 증대로 인한 세금부담의 증가를 주요인으로 들고 있다.

 

참고 : 네이버 검색 결과
일조편법 [一條鞭法] 
요약
명(明)나라 후기부터 청(淸)나라 초기까지 중국에서 시행된 세역(稅役) 제도.
본문
당(唐)나라 중기에 양세법(兩稅法)이 시행된 이후, 농민들의 국역부담은 하세(夏稅)·추세(秋稅)의 양세와 각종 요역(役)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명나라 초기에도 국역은 양세법에 따라 보리·쌀 등을 현물로 바치는 하세·추세와 이갑정역(里甲正役) 및 기타 잡역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상품 유통과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농업생산물이 다양화하고, 조세의 은납화(銀納化)가 진행되어 징세 항목과 종류가 증가하게 되었고 요역도 이갑(里甲)·균요(均)·역전(驛傳)·민장(民壯) 등으로 복잡해져 징세사무의 번잡, 관민(官民) 간의 부정부패, 농민부담의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세역의 화폐수입 확보와 징세사무의 간소화를 위해 잡다한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던 전부(田賦)와 요역을 각각 하나로 정비해서 납세자의 토지소유 면적과 정구수(丁口數)에 따라 결정된 세액을 은으로써 일괄 납부하게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1560∼1570년경에 먼저 강남(江南) 지역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점차 화중(華中)·화북(華北) 지역으로 보급되어 일조편법이라 불려졌다.
일조편법하에서는 하세·추세의 합산 은액(銀額)이 일률적으로 토지에 부과되었고 요역은(役銀)도 모두 지세(地稅)인 지은(地銀)의 부가세가 되어 세역 모두 전토(田土)를 부과 대상으로 하는 경향으로 진전되어 결국 청나라 때에 들어와 지정은(地丁銀) 제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일조편법은 국가의 기본적 조세부과 대상이 호(戶)에서 전토(全土)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세와 역의 징세 기술면의 일대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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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제국주의 -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폴 코헨 지음, 이남희 옮김 / 산해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1970년대 이전 미국의 중국 연구자들 -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의 중국에 대한 연구자들 - 이 가졌던 연구경향을 분석, 비판하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연구경향을 요약하고 있다.

코헨은 기존의 접근법을 세가지로 대별하고 있다. 그것은 충격-반응 접근법, 근대화 접근법, 제국주의 접근법이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19세기 중국사를 서양의 충격에 따른 중국의 반응으로만 해석하는 방법이다. 근대화 접근법은 전통시대와 근대로 긴 중국의 역사를 간단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방식이다. 제국주의 접근법은 근대화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 접근법이다. 세가지 접근법 모두 서양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중국 내부의 발전이나 갈등구조를 등한시한다. 세가지 접근법은 모두 무엇이 중국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촉진 또는 방해했느냐는 목적론적 접근법에 함몰되어 실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비목적론적 질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연구성과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에서 매우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부분은 제3장 초반의 제임스 펙에 의한 기존 중국전문가 비판과 반비판, 이어진 반반비판 그리고 저자의 촌평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야기된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반성 또는 증오가 미국내 중국학 학계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980년대 남한 대학가를 휩쓴 지적 광풍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주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중동 지역 연구에 있어  서구의 편견을 잘 보여준 것처럼 폴 코헨은 오리엔탈리즘의 폐해가 중국 연구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인문학 관련 책으로 치부될 수 없는 사회과학자에게도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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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1. 대토지소유자들은 세금(전세, 부역, 공물을 모두 포함)을 회피할 능력 또는 자격이 있다.

명제 2. 황제 또는 임금은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또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수를 늘리려고 한다.

명제 3. 황제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소토지소유자들을 살찌워서 그들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늘리거나 아니면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 둘 중의 하나를 취할 수 있다.

명제 4.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은 조선시대 대동법처럼 공납을 지세화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명제 5. 소토지소유자들을 늘리는 극단적인 방법은 혁명의 시기에 대토지소유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토지소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 공신들이 새로운 대토지소유자들로서 등장함에 따라 이런 정책은 결국 실패하였다. 예를 들어 명태조는 귀족과 공신관리에게 장원토지를 분배하였는데 이를 축소하려는 태조말년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명대 전체를 통해 이런 계획은 성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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