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을 둘러싼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일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으로부터 유래한 대립이기도 했다. 제임스 류는 "왕안석과 개혁정책"이라는 책에서 몇가지 대립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지역적 대립을 들 수 있다. 개혁파는 남방 출신이며 보수파는 북방 출신이다. 북송 중기에는 과거합격자 및 고관의 수에서 남방 출신이 북방 출신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지역적 대립에서 중요한 것은 화폐경제문제이다. 남방에서는 화폐경제의 발달이 현저하였다. 왕안석의 주요 정책은 화폐 및 금융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나아가 보수파는 대상인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고 화폐경제의 발달과 금융시스템의 정비, 재정제도의 발전은 기존의 독점적 상인의 이해를 침해하였고 이들의 입장이 보수파의 의견에 반영되었다.
개혁파는 비교적 최근에 관위를 획득한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이에 비해 보수파는 오랫동안 관위를 유지해온 가문이었다.
개혁파는 신흥 중소지주층과 관료가문 출신이었다. 이들의 주 수입원은 토지소유가 아니라 봉록이었다. 이에 비해 보수파는 대토지소유자의 이해관계를 대표하였다. 그리고 대토지소유자에 의한 탈세가 북방에서 심각했다.
제임스 류가 지적한 또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개혁과정에서 관료와 서리의 역할이었다. 왕안석은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서 관료와 서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부패하였다는 것이다. 개혁은 관료와 서리에게 또다른 부패를 낳는 권한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왕안석이 이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고, 몇가지 개혁을 추진했다. 예를 들어 왕안석은 구법 하에서 거의 봉급을 받지 못하던 서리에게 봉급을 줌으로써 부패에의 유혹을 차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재정 상 줄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고 이전의 수입의 절반에 못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