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신분제사회는 고정된 사회지만 송대(960-1279)에 들어가면서 사회는 침체를 깨트리고 발랄한 활동을 개시한다. 송대는 중국의 르네상스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후한 이후 당까지 긴 경제의 하강국면이 반전되어 호경기가 도래한다. 석탄의 이용, 철의 생산액 급증, 은의 유입 등이 어우러지면서 상승세가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데 호황을 지나면서 송대는 점차 정체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미야자키, p. 46)

 


1300년경(원 중기)부터 1500년경(명 중기 홍치제) 사이에 중국 중세의 경제혁명은 멈추고 중국의 경제는 쇠퇴했다. 비록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활기찬 경제성장이 재개되었지만 양적 성장만 있었을 뿐 과거 시대의 활발한 기술혁신과 발명과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경제의 활력이 소멸한 이유는 첫째, 변경의 미개척지(미국의 프론티어를 떠올리면 된다)가 사람에 의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해외무역 및 외국인과의 접촉이 감소하면서 외국 은의 공급이 줄어들었다. 명태조의 경우 해금(海禁)을 단행하였고 공식적인 조공무역만을 인정하였다. (엘빈 p. 207)

 


이스트만 역시 엘빈과 마찬가지로 송대를 중국경제의 최전성기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스트만은 15세기 이후의 경제의 부침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송대(960~1279)에 중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이후 경제는 침체되었다. 그 이유로는 13세기 몽고침략, 14세기 역병의 만연, 1450~1540년 사이 전세계적인 냉각화 경향, 명대 초기의 해금정책(海禁政策)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 침체의 징후는 인구의 감소로 나타난서 1200년 1억 1천만명이었던 중국이 명초에 겨우 6500만~8000만명 정도 수준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호황에 동반되었다. 1581년 단행된 일조편법은 화폐경제를 촉진시켰다. 18세기까지 경제는 대체로 완만한 성장세를 유지했으며 19세기에는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다. (이스트만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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