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수렴하는가, 양극화하는가

 

 

 

2003. 11. 8

Version 0.9 

 

 

오늘날 세계는 하루 100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사람과 하루 1달러도 벌지못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룩셈부르크는 일인당 GNI가 38000달러가 넘는데 비해 콩고 공화국은 8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나라간의 소득격차는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잘사는 나라와 못하는 나라의 격차는 늘 있어왔다. 우리가 이 글에서 주로 관심을 갖는 문제는 나라간 소득불평등이 점차 완화되고 있는 추세인지 아니면 점점 심화되고 있는지이다.

시점을 너무 거슬러올라가면 나라간 소득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평가하기 힘들다. 기원전 1세기의 나라간 소득격차를 분석하는 것은 코끼리 장님 만지기에 가까울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의 국민소득에 대한 자료는 경제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 개발된 바 있지만 이것도 현재의 주요 선진국들에 한정된다. 이 글에서는 비교적 통계자료가 잘 정비되어 있는 2차대전 이후로 한정하기로 한다.

2차대전 이후로 시기를 한정짓는 이유가 단순히 통계자료의 유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이전에는 상당수의 나라들이 선진국들의 식민지였고 전근대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2차대전을 계기로 독립한 후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근대화정책과 경제발전을 추구하였다. 2차대전 이후에 한정함으로써 식민지라는 핸디캡이 없는 나라들 간의 비교가 가능해진다.

대표적인 나라간 소득 자료는 펜실베니아 대학 연구소에서 만드는 Penn World Table이다. 이 자료를 이용해 2차대전 후 나라간 소득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나라간 소득격차를 표준편차로 계산해볼 경우 표준편차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달러로 환산한 국민소득을 1960년과 2000년에 대해 비교해보았다. 1960년과 2000년 모두 자료가 존재하는 나라는 99개국이다. 1960년의 평균소득은 828달러였는데 2000년 평균소득은 9982달러였다. 40년 사이 빠른 속도로 국민소득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표준편차는 1960년 770달러에서 2000년 10517달러로 증가했다. 절대적인 수준에서 표준편차가 대폭 증가했다. 그런데 표준편차의 절대수준 증가는 소득격차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표준편차를 평균으로 나눈 변이계수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 변이계수를 비교해보아도 소득불평등은 심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변이계수(=표준편차/평균)는 1960년 0.92에서 2000년 1.05로 상승하였다. 

소득분포의 누적확률분포를 보여주는 것이 <그림 1>이다. 가로축은 상대소득수준을, 세로축은 누적확률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가로축 60에 대응되는 높이는 0.8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 소득에 대비한 상대소득이 60% 이하인 나라는 전체 나라 중 80%라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에 대비한 상대소득이 10% 이하인 나라의 비중이 1960년에는 24%였는데 2000년에는 36%로 급상승하여 50% 증가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 비해 상대소득이 50% 이상인 나라의 비중은 증가하여 1960년에 19%에서 2000년 24%로 늘어났다. 매우 가난한 나라는 더 늘어났고 중상위권 나라도 늘어나는 양극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양극화 현상은 <그림 2>에서 더 명확히 볼 수 있다. <그림 2>는 <그림 1>의 누적분포함수에 대응한 소득분포의 밀도함수를 의미한다. 각 소득구간에 속한 나라의 비율을 보여주는 상대돗수분포표를 그래프로 그린 히스토그램으로 해석하면 된다. 미국에 대비한 상대소득 이 0-10% 구간의 나라가 크게 늘고, 상대소득 70-80% 구간의 나라도 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신 중하위권(10%-50% 사이 구간)의 나라들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60년에는 나라별 소득의 분포가 상대소득 10-20%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몰려있는 봉우리 하나의 분포의 모양(單峰分布)을 띠지만 2000년에는 0-10%에서 한번 봉우리가 솟고 70-80% 구간에서 다시 한번 봉우리가 솟는 분포의 모양(雙峰分布)을 갖는다. 지난 40년간 양극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표 1>과 같은 이행확률표를 통해 분석할 수 있다. 이행확률표는 1960년대에 어떤 상대소득 구간에 있는 나라가 40년이 지난 2000년에 어떤 상대소득 구간에 놓일지의 확률을 보여주는 표이다. 예를 들어 1960년에 미국에 대비하여 80% 이상의 상대소득을 갖는 나라가 2000년에 여전히 80% 이상의 상대소득을 가질 확률은 88.24%로 매우 높았다. 이에 비해 7.5% 이하로 떨어질 확률은 0%였다. 1960년에 미국과 대비하여 7.5-20%의 상대소득을 갖는 나라가 2000년에 한단계 상승하여 40-60%의 상대소득을 가질 확률은 2.63%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7.5% 이하로 떨어질 확률은 44.74%에 이른다.

지난 40년간의 상태변화가 지속되면 세계 각국의 소득분포는 최종적으로 <그림 3>과 같은 모양을 갖게 된다. 즉, 가난한 나라들에 많은 나라가 집중되고 중간층의 나라는 거의 없고 부유한 나라에 상당수의 나라가 집중되는 양극화의 소득분포로 귀결된다.

       

<표 1> 각국 상대소득수준의 이행확률표

 

 

2000년

 

 

7.5% 이하

7.5-20%

20-40%

40-60%

60% 이상

1960년

7.5% 이하

82.35%

17.65%

0.00%

0.00%

0.00%

7.5-20%

44.74%

42.11%

7.89%

2.63%

2.63%

20-40%

4.55%

27.27%

40.91%

18.18%

9.09%

40-60%

0.00%

0.00%

20.00%

40.00%

40.00%

60% 이상

0.00%

0.00%

5.88%

5.88%

88.24%


          <그림 3>

최종적으로 세계 소득분포가 <그림 3>과 같이 수렴된다고 해서 한 나라가 계속 같은 수준으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소득분포는 유지되지만 개별 나라는 일정 확률로 상대소득이 변화하여 상향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올라가는 나라도 있는 반면 내려가는 나라도 있기 때문에 전체 소득분포는 변하지 않는다.

또하나 우리가 주목할 현상은 나라별 경제성장의 안정성이 초기 소득수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초기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2-3% 내외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득수준이 낮아지면 나라별로 경제성장률의 차이가 커지고 소득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나라도 있고 매우 높은 고도성장을 하는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림 4>는 1960년 일인당 GDP와 40년간의 연평균 성장률을 도시한 것이다. 1960년에 소득 7000달러 이상인 나라들의 경제성장률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60년에 3000달러 이하의 나라들은 엄청난 경제성장률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들의 경제성장은 매우 불안정하지만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의 경제성장은 안정적임을 말해준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한 나라가 경제성장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상대소득 60%를 넘어서면 매우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지만 중간 이하의 소득수준에서는 불안정성이 높아서 성장하다가도 쇠퇴하고 쇠퇴하다가도 성장하는 부침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표 1>의 이행확률표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 상대소득 60% 이상의 나라들은 여전히 상대소득 60% 이상에서 머무를 확률이 88.24%로 매우 높지만 1960년대 20-40%의 나라들은 그 이하로 떨어질 확률이 30%, 이상으로 올라갈 확률이 30%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림 4>에서 서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만을 뽑아내어 그린 것이 <그림 5>이다. 그림에서 명확히 볼 수 있듯이 1960년에 소득수준이 높았던 나라들은 경제성장률이 낮고 소득수준이 높았던 나라들은 경제성장률이 높다. 서유럽, 미국, 일본 사이에서는 소득의 수렴현상이 돋보인다.

  

          <그림 4>                                    

 

 

  

     <그림 5>

 

이상에서 설명한 세계 소득분포의 현황과 전망은 매우 암울해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나라의 수를 중심으로 한 것인데 실제 빈곤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인구수를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나라의 인구증가율이 동일하다면 나라 수로 따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인구증가율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문제는 저개발국일수록 인구증가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림 6>에서 보는 것처럼 1960년을 기준으로한 상대소득에 비추어볼 때 저소득국의 인구증가율이 고소득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소득국이 더욱 더 가난하게 되는데 여기에 인구도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므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인류의 비중은 더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희망적인 소식은 있다. 그것은 중국의 성장이다. 중국은 99개국 전체 인구 중 25%를 차지한다. 그런데 1960년에 미국 소득의 5%에 불과했던 중국이 최근 20년 사이 급성장하여 10%가 되었다. 현재의 고성장세를 유지한다면 중국은 빠르게 미국과의 상대소득 격차를 줄여갈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99개국 중 한 나라가 최빈국에서 탈출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세계 인구의 25%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저성장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하나 줄어드는 의미 이상으로 세계인구의 25%가 빈곤의 함정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림 6>


지금까지 우리는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각국의 일인당 국민소득 자료를 이용하여 나라간 소득격차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았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경제성장이론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솔로우 성장모형 및 그것의 확장된 모형을 신뢰하는 이들은 나라간 소득분포의 변화를 이론적으로 나라별 균제상태 소득수준으로의 수렴으로 설명한다. 가장 단순한 솔로우 모형에 따르면 각 나라는 그 나라의 저축률과 인구성장률에 대응되는 균제상태 소득수준을 갖는다. 자본축적과 함께 각 나라는 균제상태 소득수준을 향하여 성장해가고 균제상태 소득수준에 도달하면 경제성장은 멈추게 된다.


<그림 7> 솔로우 성장모형에서의 절대적 소득 수렴


모든 나라의 저축률과 인구성장률이 동일할 경우 나라간 소득 차이는 자본축적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결정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나라들이 동일한 균제상태 소득수준으로 수렴한다. 이러한 가설을 절대적 수렴가설이라고 부른다. <그림 7>은 절대적 수렴가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로축은 소득수준이며 수평선의 높이가 균제상태 소득수준을 보여준다. 가로축은 시간을 의미한다. 시작점에서 각 나라들은 소득수준에 차이가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일한 균제상태 소득수준으로 수렴한다. 절대적 수렴가설은 2차대전 후에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국가와 일본이 미국의 소득수준을 추격해간 사실을 설명하는데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앞서 살펴본 <그림 5>는 수렴현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2차대전 후에 독립국가로 출발한 수많은 개발도상국과의 소득격차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은 이러한 절대적 수렴가설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솔로우 모형을 약간 수정하면 지속적인 나라간 소득격차를 설명할 수 있다. 저축률이 높은 근면한 나라의 균제상태 국민소득 수준은 저축률이 낮은 나태한 나라의 균제상태 국민소득 수준보다 높다. 근면한 나라들은 높은 소득수준으로 수렴하고 나태한 나라들은 낮은 소득수준으로 수렴한다. 이처럼 저축률, 인구성장률 등에 차이가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처음에 나타나는 소득의 차이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그림 8>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8> 솔로우 성장모형과 소득 격차


각국은 자신들의 균제상태 소득수준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조건부 수렴가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조건부 수렴가설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지속적인 소득격차를 설명할 수 있지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소득격차가 커져가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조건부 수렴가설을 통해 소득 격차의 확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림 9>이나 <그림 10>와 같은 상황이 가정되어야 한다. <그림 9>와 <그림 10> 모두 시작시점에 비해 자본축적이 진행된 이후 소득격차가 더 커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은 2차대전 직후에 선진국들은 균제상태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개발도상국들은 균제상태에 이미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개발도상국은 발전의 잠재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이고 선진국들은 잠재력이 풍부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림 4>는 2차대전 직후에 선진국들은 균제상태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개발도상국들은 이미 균제상태보다 더 높은 소득수준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위 두가지 가정 모두 상식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조건부 수렴가설은 소득격차의 “존재”는 설명하지만 소득격차의 “확대”는 설명하는데 난점을 안게 된다.


<그림 9> 조건부 수렴가설과 소득격차 확대 1

<그림 10> 조건부 수렴가설과 소득격차 확대 2


솔로우 성장모형과 수렴가설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은 저개발국이 저성장함정(low development trap)에 빠져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저개발국과 선진국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균제상태 소득수준은 비슷하다. 문제는 저개발국이 함정에 빠져있어서 더 이상의 성장이 막혀있는데 비해서 선진국은 균제상태로 향하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득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만약 저개발국이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저개발국은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1>은 저성장함정 가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 11> 저성장함정과 소득격차의 확대


저개발국이 왜 저성장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느냐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다. 우선 대표적인 이론으로 종속이론을 들 수 있다. 종속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저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이 제안한 것이다. 종속이론의 기본골자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제국주의-식민지관계는 사라졌지만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식민지관계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선진제국주의국가가 저개발국의 경제적 잉여를 착취하여 저개발국이 창출한 잉여 중에서 재투자될 부분이 부족하여 성장이 어렵다는 것이다. 종속이론은 저성장의 책임이 저개발국 자신이 아니라 선진제국주의국가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속이론은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소수파의 주장으로 축소되었다. 

최근의 흐름은 저성장의 원인을 내부적인 측면에서 찾는 것으로 집중되고 있다. 아자리아데스는 저성장함정 가설을 제안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경제성장에서는 인적자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인적자본량의 축적은 전세대의 인적자본량이 이월된 위에 현세대가 얼마의 인적자본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인적자본량이 결정되는 구조를 갖는다고 상정했다. 경제성장의 문제는 인적자본투자가 지속될 수 있느냐로 집약되는데 아자리아데스는 전세대로부터 너무 낮은 인적자본을 물려받은 현세대는 인적자본에 투자하지 않게 되고 이에 따라 다음 세대에게도 낮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그대로 물려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경제성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다음세대 역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비해 전세대로부터 일정수준 이상의 인적자본을 물려받은 현세대의 경우에는 인적자본에 투자하고 이에 따라 다음 세대에게 전세대로 받은 것보다 더 큰 인적자본을 물려주게 되어 경제성장이 지속된다. 후진국은 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인적자본량이 너무 작기 때문에 저성장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고 선진국은 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인적자본량이 크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인적자본량이 작을 경우 현세대가 추가적인 인적자본투자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자리아데스는 <그림 12>처럼 인적자본량 수준에 따라 생산량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림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일정수준의 인적자본량을 넘어서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예로 설명해보자.

학생들이 공부시간을 처음에 조금씩 늘릴 때는 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공부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성과가 가시화되는 것을 볼 때가 간혹 있다. 많은 학생들이 처음에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해버리는데 이 경우에는 결국 낮은 점수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 만약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꾹 참고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전에 쌓았던 노력들이 일거에 보상되면서 성적이 대폭 상승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특성이 경제에서도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그림 12>에 반영된 아자리아데스의 생각이다.

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전세대로부터 매우 낮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물려받은 현세대는 인적자본에 투자한다고 해도 생산량 증가가 크지 않아서 현세대도 인적자본에 투자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다음세대도 인적자본에 투자하지 않는다. 전세대로부터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물려받은 현세대의 경우에는 자신이 인적자본을 조금 늘릴 때 생산량 증가가 매우 크고 따라서 인적자본에 투자할 유인이 충분하여 그 결과 다음세대는 더 높은 인적자본을 물려받고 그 역시 계속 인적자본에 투자하게 된다.

<그림 12> 인적자본수준과 생산량의 관계


저개발국이 저성장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충격이 필요하다. 만약 외부적인 충격에 의해 갑자기 저개발국의 인적자본 수준이 임계치 이상이 되면 인적자본수준이 높기 때문에 인적자본 투자로 인한 수익성이 높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인적자본 투자를 많이 하고 이에 따라 고성장이 계속될 수 있다. 사람들의 자발적인 결정에 맡겨두면 계속 인적자본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정부가 강제로 투자하도록 하거나 유인책을 제공하여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일정기간 성과없는 투자를 계속하면 어느 순간 경제는 고성장의 고속도로에 올라서 있음을 발견한다.

이상의 설명은 인적자본의 생산기여도가 독특한 양상을 띤다는 가정에 입각해있다. 이러한 가정 없이 인적자본축적과 연구개발투자 사이의 상호보완관계를 이용하여 저성장함정을 설명할 수도 있다. 경제성장은 노동자의 인적자본의 수준에도 의존하지만 노동자를 이용하여 생산을 하고 이윤을 얻는 기업이 어떤 기술을 채택하느냐에도 의존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인적자본수준과 기업의 기술수준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 경우 저성장함정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초등교육만을 받을 것인지 고등교육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자. 기업은 단순기술의 생산을 할 것인지 아니면 고도기술의 생산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자. 고등교육의 비용과 고도기술의 채택비용이 초등교육과 단순기술의 채택비용보다 높다. 노동자가 고등교육을 받고 기업이 고도기술을 채택하면 가장 높은 수준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노동자가 초등교육을 받고 기업이 단순기술을 채택하면 낮은 수준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노동자가 고등교육을 받고 기업이 단순기술을 채택하면 노동자는 교육투자에 들인 비용에 형편없는 수입을 누리게 되어 손해를 보지만 기업은 숙련도가 높은 노동자를 쓰게 되므로 높은 이윤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는 초등교육을 받고 기업이 고도기술을 채택하면 기업은 고도기술투자비용을 건지지 못하고 손해를 보지만 노동자는 보다 생산성 높은 일을 하게 되어 교육투자비용에 비해 높은 이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와 기업이 (마치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동시에 선택을 해야한다면 각각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앞에서 설명한 상황을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이 협조를 하면 고등교육과 고도기술의 채택이 이루어지지만 각각 자신에게 최대의 이득이 될 것이 무엇인지와 상대방의 행동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여 행동하게 되면 놀랍게도 나쁜 결과인 초등교육과 단순기술이 선택된다.

노동자는 인적자본에 적게 투자하고 기업도 인적자본이 별로 필요하지 않는 생산기술을 채택한다. 노동자는 기업이 단순기술을 채택하기 때문에 자신도 초등교육만 받는다고 말하고 기업 역시 노동자가 초등교육만을 받기 때문에 자신도 단순기술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낮은 수준의 투자량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저개발국이 처한 저성장함정과 닮았다.

이상에서 제시된 설명은 저성장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몇몇 나라들은 지난 수십년간 고도성장을 계속하여 저성장함정에서 벗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60년에 상대소득이 7.5%-20% 구간에 있었지만 2000년에는 40-60% 구간으로 이동했다. <표 1>에 의하면 이렇게 높아질 확률은 2.63%에 불과했다. 앞선 저성장함정 이론으로 이들 나라의 경제기적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고도성장에 대해 높은 교육열과 중등교육의 빠른 확산을 그 이유로 꼽고 있긴 하지만 실제 저성장함정을 벗어나지 못한 많은 저개발국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중등교육의 확산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저성장함정 가설로는 처음에는 경제성장에 성공하는 듯 하다가 다시 실패하는 나라들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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