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기억하는 고종석은 한겨레 신문의 기자다. 나는 그를 당시 한겨레 신문에서 몇안되는 문재를 가진 기자로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모르는 사이 고종석은 한겨레 신문을 떠났고 파리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와 낭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요즘 말로 한겨레와 약간 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당시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것을 확인한 것은 이 책에서 처음이다. 한겨레에서 벌어진 정운영-복거일의 자유주의 논쟁에서 그는 복거일의 중도우파적 입장을 지지했던 것이고 정운영 및 당시 한겨레의 중도좌파적 입장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앞선 많은 서평에서 지적하고 있듯 이 책의 백미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글이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 논쟁을 떠도는 풍문으로만 듣고 있던 나로서는 고종석의 글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복거일의 논리와 비판자들의 논리를 차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책값을 다한 셈이다. 고종석은 이 글을 통해 역사적으로 문화의 교류가 얼마나 개별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역설하고 언어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하자면 중국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중국의 문화재들을 살펴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고 내가 조선족이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얼마나 더 가슴 뿌듯할까 하는 ‘불순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고종석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인이라고 말한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중국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어공용화를 정책목표로 삼아 추진하는 것이 나은가 아닌가의 문제는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복거일이 민족어의 소멸속도를 다소 빠르게 잡은 것과 고종석이 소멸속도를 이보다 느리게 잡은 것과 비교할 때 나는 고종석보다도 훨씬 그 속도가 느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도의 차이는 비용의 차이이기도 한데 복거일보다 나는 언어 전환비용이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유럽어족과 알타이어족의 차이는 전환비용을 가중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경제학을 전공한 복거일은 아마도 비용편익분석의 관점에서 비용을 낮게 잡으면 공용화 정책의 경제적 순이득이 쉽게 양의 값을 가질 것임을 계산했을 것이다. 언어 전환비용이 크고 속도가 느리면 현세대는 전환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고 비용만 부담하고 미래세대가 이를 누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현세대가 쉽게 전환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나는 일본의 난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일본의 번역문화에 대해 경탄해하고 궁금해했었는데 그 뿌리를 알게 된 것이 기쁘다. 이 책 곳곳에 보석같은 지식과 논변이 숨어 있다. 책값도 비싸지 않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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