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의) 기본 아이디어는 이미 임진왜란 때부터 나왔지만 실행하는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충청도 시범 실시 (효종) → 전라도 확대 실시 (현종)를 거쳐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자리 잡은 제도에 대한 경직성은 극복하기 쉽지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임토작공에 대한 집착이다. 임토작공은 지방 제후가 천자에게 토산품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개념을 담고있다. 토산품 대신 쌀이나 포로 바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았다. 하지만 조선 땅에서 옛 중국의 문명을 재현하고 싶어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를 포기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거친 반발을 가져왔다.
두 번째는 부유층의 반발이었다. 공물은 기준이 일정치 않았지만, 대체로 호, 즉 가구를 기준으로 책정했다. 즉 부유층이든 하층민이든 납세액이 같았다. 그런데 대동법은 토지 1결당 12두의 쌀 또는 이에 해당하는 가치만큼의 포(무명)를 내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과거에는 땅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한 가구당 부담액이 비슷했는데 이제는 소유한 토지(재산)에 따라 부담액이 더늘어나게 된 것이다. 가장 격렬한 반발이 나온 지역도 땅 부자가 많은 호남이었다. -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