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망


당시 중국의 최대 안보 위협은 몽골이 버티고 있는 북방이었다. 수도 베이징은 만리장성 바로 아래에 있었고, 과거 몽골에 실제로 지배당한 적도 있었기에 북방을 방비하는 데 세금의 상당량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남쪽의 해양 진출에 계속해서 대규모 예산을 편성하기란 어려웠다. 또한 포르투갈이나스페인에게 해양 진출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간절한 돌파구였다면, 중국에게 해양 진출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정화의 대원정도 굳이 따지면 명나라의 위상을 위한 과시용에 가까웠다.

(중국) 북방의 긴장은 중국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전국에서 은이 부족해졌고, 남쪽 해안에서는 은의 밀무역이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대 6이었지만, 일본에서는 1대 12였다. 즉 일본은 은이 훨씬 쌌다. 중국의 절반 가격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일본에서 은을 사서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를 본 일본도 밀무역에 나섰다.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2,300톤 정도인데 일본산 은이 1,200-1,300톤 정도였다고 한다. 이익이 짭짤했으니 위험을 무릅쓸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P244



조선에서 탄생한 연은분리법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 1533년이다. 5년 뒤 일본은 조선 정부와 거래할 무역품으로 은철 315근을 가져왔다. 기록상 일본이 무역품으로 은을 가져온 것은 이때가 최초다. 그만큼 은이 풍부해진 것이다. 이후 일본은 은을 대규모로 조선으로 가져와 거래했는데, 얼마나 많이 유통이 되었는지 조선의 은 가격이 폭락했다. 1538년 은 1냥 당 면포 4필이던 것이 4년 뒤인 1542년에는 은 1냥 당 면포 반 필로 그 가치가 8분의 1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조선으로 들어온 은은 다시 조선의 대중국 무역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세계 2위의 생산량을 자랑하던 이와미 은광의 막대한 은이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동아시아 무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을 촉발한 것은 조선의 노비와 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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