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한랭화와 해금정책



한편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이들은 해상 무역 세력이었다. 그래서 명나라 초기 해안을 침략한 왜구도 해금 정책에 반발한 해상 무역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중국인 무역상들이 왜구에 가담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명나라가 상업이나 무역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는 쪽으로 회귀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1368년)한 14세기 후반은 한랭기의 충격이 수십 년간 쌓인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급선무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점포에서 주판을 잡기보다는 시골의 농지로 돌아가 호미와 괭이를 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개국한 조선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의 수도가 개경에서 남쪽인 한양으로 이동한 것이 삼남(충청·전라·경상) 지역의 식량 생산성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한랭화로 인해 황해도나 평안도, 경기 북부에서는 이전보다 쌀농사를 짓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 생산은 남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식량 생산지와 수도의 거리를 더욱 좁힐 필요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명나라와 조선의 중농억상정책은 원나라와 고려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지만, 기후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인류 문명은 결국 기후와 얼마나 친숙해지느냐에 흥망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 고려 말인 이유도 기후 영향이 컸다. 최근 지적되고 있지만 원나라는 목화씨 반출을 막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은 백성들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려면 더 따뜻한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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