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습

일본의 승전 열기는 말레이 반도 및 필리핀을 비롯한 남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육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지속됐다. 그런데 1942년 4월 중순 어느 날 이러한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두리틀J. H. Doolittle 중령이 이끈 미군의 장거리 폭격기(B-25) 16대가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출격하여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를 비롯한 몇 곳의 중요 도시들을 폭격했던 것이다.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주변 방어선을 확대하여 일본 본토의 안전을 도모코자 했다. 동시에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미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유인하여 격멸할 심산으로 하와이 북서쪽 1,8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 섬 점령작전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 <전쟁과 무기의 세계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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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 대한 기습적인 공습으로 결과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라는 성과를 달성했던 미군은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공습을 시도했다.

실제적으로 일본 본토 도시들에 대한 미 공군의 공습작전은 1944년 말에 이르러 본격화될 수 있었다. 1944년 8월 미 해군의 마리아나 군도 점령 성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전쟁과 무기의 세계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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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1월 말에 도쿄 인근의 한 항공기 제작공장에 대한 공습을 시발로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에 대한 야간 무차별 폭격이 본격화됐다. 이들 중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충격을 가한 사건은 1945년 3월 9일 밤에 감행된 수도 도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었다. 약 300대의 B-29폭격기들이 출격, 3시간에 걸쳐서 무려 50만 개에 달하는 소이탄을 목조건물로 빼곡한 도쿄 시내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결과는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도쿄 전체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총 41평방킬로미터 지역이 불타고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로도 미군 폭격기의 공습은 도쿄는 물론이고 나고야, 고베, 오사카 등 다른 도시들로 확대됐다. 이러한 지속적인 타격의 결과, 1945년 7월경에 이르면 일본의 패배는 명백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사망한 거나 진배없는 일본정부가 계속하여 관 속에 드러눕기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전쟁과 무기의 세계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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