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과 카를 대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은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다. 그 후 전개된 유럽의 대략적인 역사는 동쪽에서 로마 제국의 법통을 이은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는 사이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서유럽인들은 잇따른 내홍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지자 차츰 번영과 질서가 있었던 로마 제국을 그리워했다.
8세기 후반 그들의 염원대로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며 현재 서유럽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였다. 샤를마뉴(Charlemagne)는 프랑스어 이름이며, 영어 이름은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독일어 이름은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라틴어 이름으로는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로 부르기도 한다. - <지도로 읽는다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신>, 김정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W6j4J9NaCo6NRRM7

다만 봉건제에는 장점만큼이나 커다란 단점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왕은 제후들에게 1년에 통상 40일 정도의 군역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하고 체계적인 전술을 익힐 수 없었다. 더구나 엘리트 의식이 강한 기사들이 보병과 제병합동전술諸兵合同戰術을 구사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 큰 문제점은 쌍무적雙務的 계약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봉건제하에서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국왕이 있을 때 비로소 결집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군주가 유약하거나 국왕이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독자적 군사력을 지닌 제후들이 제멋대로 난립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봉건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과 신성로마 제국이 유럽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각각 샤를마뉴와 오토 대제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신>, 김정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939

프라하와 카를4세

독일어: Karl IV. (카를 4세)
체코어: Karel IV. (카렐 4세)
이탈리아어: Carlo IV (카를로 4세)
라틴어: Carolus IV (카롤루스 4세)

나무위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 왕국의 왕. 체코어로는 카렐 4세로 부른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는 달리 다소 이색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했던 황제.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카를 4세는 부계 혈통으로 체코인[2]이 아니기 때문에 혈통상 완전한 체코인으로 보기에는 애매할 수 있지만, 어쨌든 본인이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통치했고, 스스로 보헤미아에 애정을 갖고 체코 문화에 동화된 인물이었기에 체코인으로 보는데 큰 무리는 없는 편이다.

오늘날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주로서 체코인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오늘날 체코의 아버지, 체코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며 체코의 100코루나 지폐에도 들어가 있다. 2012년 체코인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체코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반면 보헤미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그의 치세는 긍정적이진 않았는데, 그가 1356년 발표한 금인칙서로 인해 선제후들이 사실상 독립한 군주와 같은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황권이 약화되어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인보다 체코인들에게 더 좋은 평을 듣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셈이다.[3]

알함브라와 카를5세

나무위키
이사벨라 1세가 인근에 신도시이자 그라나다 포위망의 완성인 산타페를 건설하고 결국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기독교 세력은 이 궁전도 접수했다. 이교도 상징이 빼곡한 공간이었음에도, 스페인 국왕이나 귀족들은 이 곳을 궁궐로 쓰길 원했다. 이사벨라 1세의 손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는 이 궁전에서 거주하기 위해 새로운 카를로스 5세 궁전을 알함브라 한가운데에 지었다. 그렇지만 양식이 이질적이었고 오랜기간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는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이교도 상징을 지우기 위해[10]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도 짓고, 궁궐의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이전에 있던 아름다운 여러 건물들과 장식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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