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범람과 청의 송 자유주의로의 복귀




그런데 명나라 중국은 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유시장을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앞에서 논한 것처럼 부족이 원나라 쇠퇴를 가져왔던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은만 충분했더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은이 필요하다. 뭘 하든 은이 필요하다, 은만 있으면 송 · 원나라시대의 자유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염원하고 있던 차에 정말로 은이 출현합니다. 어디에서냐 하면, 하나는 이와미 등 일본의 은 광산이고 다른 하나는 포토시 은광산(현재의 볼리비아, 1545년 개발)을 시작으로 한 라틴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입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 전국시대로 불리는 16세기는 실은 전 세계적인 전국난세가 됩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왜구 마피아 외에 모피와 조선인삼의 교역로를 장악한 만주 마피아(이후의 청나라), 동남아시아의 은유통로에 입각한 대만 마피아와 이슬람 마피아, 새로운 참가자인 남만마피아(유럽인)가 움직였으며, 유럽에서는 이 비등하는 화폐욕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결부되어 예를 들면 면죄부 판매나 금욕주의에 대한시비를 둘러싸고 기독교가 분열하여 가톨릭대 프로테스탄트의 유혈 낭자한 종교전쟁이 발생합니다.

마피아, 마피아라고 집요하게 쓰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원래 명나라가 사회주의 정권처럼 자유경제를 억압했기 때문에 마피아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마피아이기 때문에 야만이라든가 구식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오랑캐‘로 멸시받던 만주족에서 천자를 낸 청이란 왕조는 송나라 이후 중국사회의 변화를 집대성한 하나의 극점이라고 해야 할 문명입니다.

청나라는 경제정책에서도 송나라 이후의 노선에 극히 충실하여 인두세를 완전히 포기하고, 민중의 소재를 치밀하게 파악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화폐유통의 관리(예를 들면 은과 동전의 교환비율 설정이나 지역통화적인 지폐의 발행)도 민간에게 완전히 맡기는 등 정부가 사회를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궁극의 자유방임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 명나라의 통제경제에서 급변하여 사회에 활기가 돌아오고 미증유의 호경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세계에서 최초로 신분이나 직업을 자유화한 중화문명의 긍정적 측면입니다. 한편 이것과 표리일체의 부정적 측면으로는 국가가 부의 재분배기능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재의 중국과 동일하게) 시장경쟁의 승자와 패자 사이에 절대적인 격차가 발생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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