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렐4세, 성 바츨라프 그리고 두브체크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소설가·화가·음악인이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250
부계는 룩셈부르크 왕가이고 모계는 보헤미아 왕가였던 카렐 4세는 1346년 보헤미아왕으로는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체코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해 관료와 법률가를 양성하고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프라하성과 성 비타 성당 건축도 그가 주도했다. 자녀들의 정략혼인을 통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고 스위스 티롤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세 아들과 조카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체코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연 군주였던 그를 국가의 창설자로 여긴다. 대학과 교량과 광장 등 그의 이름을 붙인 곳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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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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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은 1956년 가을에 일어났던 헝가리 반소 민주주의혁명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다. 1968년 봄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투쟁과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바키아 태생의 반나치 전사 출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유화하고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흐름이 동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1968년 8월 21일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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