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논쟁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이 조선으로 돌아간 이듬해인 1785년에 북경에 부임했고, 예수회 출신 양동재 신부는 이미 광동으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권 쟁탈전은 전쟁에 가까웠다. 이 해묵은 선교권 전쟁의 와중에서 정작 새우등이 조선에서 터졌다. - < 파란 1, 정민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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