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조건은 자유주의적 조건과 구별된다. 그는 노동력 상품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에 의지해 ‘자유로운 노동자‘ free laborer 를 자유주의적 조건에서 작동한 주체성 형상으로 제시하고 이 형상이 걸어왔던 정치적 궤적을 스케치한다. 우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거래자로서 이해 관계를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인간학은 계급과 무관하게 만인이 평등하다고 전제한다. 물론 이는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자본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동 운동가들은 이 전제를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전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계급이라는 집합적 차원에서 전유함으로써 이른바 단체 협상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임노동 관계라는 게임에 뛰어들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해 싸웠고, 때로는 더 나아가 자본의 이윤율에 위기를 초래하려 시도했다.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라는주체성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 하는 전제일 뿐 아니라 이 착취에 맞선 운동가들이 전유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였다. - P283
신자유주의가 몽펠르렝에 모인 일군의 지식인이 세계의 병리를 진단하고 내놓은 이념적 처방이라면, 금융화는 이 처방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래한 정치 경제적 프로그램이다. 전자가 만물을 경영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기에 대한 기업가 self-entrepreneur를 전범적 주체로 내세운다면, 후자가 촉진하고 생산하는 주체는 금융 흐름을 유인하기 위해 신용도를 관리하는 포트폴리오 매니저로서 잠재적인 ‘피투자자‘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의 전망은 이념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하게 된 피투자자라는 정치적 주체성의 전모를 파악하고, 이 주체성의 레짐에서 가능한 운동 형식을 모색하는 것에 달려 있다. - P287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영향을 받았건 경험을 통해 알게되었건 산업화 시대의 노동 계급 운동가들은 임노동이 자신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착취에 책임이 있는 제도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운동가들은 모든 임노동자에게 부과된 조건을 단순히 거부하기는커녕 그 조건을 활용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는 생계를 마련할 길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 관계와 시련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상이한 부문의 임노동자는 자신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강력한 연합을 구축해 노동 시장에서 자행되는 착취에 도전했다.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임노동자를 노동력이라고 불리는 상품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판매 조건을 협상할 수 있는-의 소유자로 표상하는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지위에 반대했다. 노동조합에 동조했던 이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를 따라 이런 ‘자유‘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법률이 창조한 주관적 구성물 subjective formation일 따름이라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노동 운동은-최소한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을 노동 계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집합적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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