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보다 이 자를 처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도련님의 시대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사실 일본 좌익, 자유주의자들 관점에선 안중근이 차라리 야마가타를 처단했으면 좋았을거라고 말할 이유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선 비교도 안되게 더 유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토는 19세기 후반 특유의 근대 일본제국주의적 의미에선 자유주의적 성향도 꽤 있었고, 유연한 성향을 보였다. 반면 야마가타는 대외정책 뿐만 아니라 당장 근현대 일본 사람들 자신들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적 군국주의, 전체주의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국내 정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 사회구조의 형성에 있어서 근현대 일본인들은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고 때문에 좌익, 자유주의나 그에 준하는 성향의 일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토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더욱 악랄해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무위키에서...

야마가타를 반동주의자로만 보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는 에도 바쿠후의 나날들을 그리워하기보다 위대한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일본의 변화를 환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요시다쇼인처럼 그도 외국에서 배우는 것을 열망하여 유신 직후 1년간 유럽 여행에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그는 일본 헌법의 초안 작성을 위해 독일인 법률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화의영향력을 허용해 나라의 문을 열었을 때 생길결과에 대해 의식했다. 새로운 생각과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거나 저항할 수 있다고생각했다. 서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마가타는 민권운동이 대중의 불복종을 부추겼을 때 내무대신이었다. 그는 1880년대 초 총리였던 이토에게 ‘정당을 다루기 위한 엄격한 헌법 제정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국의 자주성보호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 P63
1882년 천황은 육군과 해군에게 야마가타가 초안을 잡은 교서를 내렸다. 그것은 현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 중의 하나였다. 그교서는 모든 일본 육군과 해군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절대적 복종은 오로지 천황에게로 향한다. 나는 여러분의 최고 지휘자이다. 여러분들과의 관계는, 내가 여러분을 나의 팔다리로서 의지하고, 여러분들은 나를 여러분의 머리로 인정할 때 가장친밀한 관계가 될 것이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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