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도 일본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노베 사건당시 서로 으르렁대던 두 파, 즉 황도파와 통제 있었다. 만주가의 책략가 이시하라 간지와 도조 히데키장군을 비롯한 통제파는서양처럼 총력전의 견지에서 미래를 내다봤다. 자본주의자와 관료에 대항해서 폭력적 반란을 계획하는 것은 그들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관료와 대기업과 협력하여 국가의 힘을 키우고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황도파는 쇼와유신 같은 혁명을 원했다. 혁명을 통해 부패 자본주의자와 고쿠타이에 반대하는 적을 제거하고 신헌법 아래에서군사 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불확실한 천황 체제의 수호자들은 항상 좌익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실제적 위협은 우익의 위협이었다. - P117
1935년 미노베 사건이 한창인 때에 정부 요직을 둘러싼 군의 다툼이 격렬했다. 통제파의 최고위 군 간부는 문제를 일으킨 황도파 장교들을 면직시켰다. 이 일로 그 간부는 무사도를 앞세워 습격한 청년장교에 의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암살당했다. 일본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이 청년 장교들의 순수함은 대중 언론에서 널리 칭송받곤 한다. 이런 상황을 가라앉히기 위해 통제파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들은 만주국으로 파견되었다. 통제파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것을 제외한다면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36년 2월 26일은 30년 만에 가장 심한 대설이었다. 바로 그 날 이른아침에 황도파의 하급 장교들은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