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사대부화
- 메이지 유신의 배경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인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전에 유학적 영향(Confucian Influence)‘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유학적 정치사상에 따라 봉건제(制)에서 군현제(制)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했다. 학교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이 설립되었고, 사무라이(군인)들이 학교를 다니는 기현상이 보편화되었다. 무술 실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유학 소양은 사무라이들의 위신과 출세에 중요해졌다. - P10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200년이 넘는 장기 평화가 지속도쿠가와 사회에서 일반 사무라이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방대한 관료제의 말단 실무자, 즉 리(吏)로 변해 갔다. 그들은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유학이 급속히 침투하면서 그들은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化)) 그리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令)을 내릴 때까지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칼 찬 사대부! 문무(文武)의 결합 속에서 그들의 행동력은 커져 갔다.

19세기에 사무라이들이 벌인 전대미문의 전국적인 정치 운동(전투가 아니다!)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 이들은 마치 명대(明代)의 중국 사대부나 조선조의 양반들처럼 ‘학(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에 기반을 두고 당파를 만들어 당쟁을 일삼았으며, 정치적 주장을 담은 상서를 쏟아 냈다. 필자는 이를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고 명명했다. 4장과 5장에서는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확산과사무라이의 ‘사화(化)‘에 초점을 맞춰 그것이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고 정치 변혁을 촉발한 요소로 작용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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