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는 남으로 월남 지역에 9군, 서남이 지역에 5군, 흉노의 하남, 하서 지방에도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요동에도 4군을 설치했다. 이들 군현은 중국 안에 만들어진 군현과는 성격이 달랐다. 무엇이 달랐는가?
중국 안에 설치된 군현에서는 개개인에게 인두세와 요역을 부과하고 병역을 징발했다. 그러나 중국 밖에 설치되었던 군현에서는 인두세, 요역, 병역을 요구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지역들에서는 한의 법률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풍속, 즉 고속故俗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 말은 이 지역 사람들의 통치가 그들의 지도자 추장, 군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황제의 대리인인 관리가 인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한다는 황제지배체제는 중국 밖의 군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전통적인 중국 안의 군현을 내군內郡이라 부르며, 중국 밖의 군현은 외군外郡, 또는 변군邊郡이라 불렀다. 한무제 당시의 중국인들도 내군과 변군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변군을 중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변군은 중국인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사는 땅이었다. 변군에서는 원래 그곳을 다스리던 토착 세력의 지배 형태가 유지되었다. 이 점에 주목해서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을 전담하는 군을 변군 중에서도 ‘내속군’이라며 다시 분류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중국의 군현을 내군, 변군, 내속군 등등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 국가의 통치체제에 대한 연구는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데 어렵게 진행해 쌓아온 오늘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세기 이전인 6~70년대의 이병도 학설 같은 것만 가지고 와서 “역사학계는 기존의 학설만 되풀이한다”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