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암살사건은 노투사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며 ‘이승만 응징’을 선언했다. 김시현은 그때 이미 나이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정만큼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1952년 6월 25일 김시현은 의열단 후배 유시태와 함께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에 참석, 연단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해 채포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김시현 일행의 권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겨우 죽음을 면했다.

김시현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나중에 무기형으로 감형돼 복역하던 중 4・19혁명으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그는 친일파로 구성된 장면 정부의 국무위원회에 들어가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1966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 때문에 지금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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