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금과 은의 교환 비율 차이는 은의 국제적 유동성을 자극했다.
16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 대 6 혹은 1 대 7이었던 것에비하여, 같은 시기 유럽의 비율은 1 대 12 였다. 일본은 1 대 10 전후였다.) 즉 유럽에서는 금의 가치가 중국의 두 배였던 반면에, 중국에서는 은의 가치가 유럽의 두 배였다. 따라서 유통비를 제외하고 보면 이론상으로는 유럽인이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싼 은을 구매해 중국까지 가져가면 그것만으로 100퍼센트의 환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신대륙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조공이나 해금은 사실상 유명무실했고, 경제적인 이윤 추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물론 중국에서 생산한 생사와 견, 면포, 도자기 등은 동아시아 해역은 물론 세계시장에서도 특히 수요가 큰 인기 상품이었다. 이러한 상품의 대가로 외국에서 은이 유입되었다. - P149
당시 남중국해의 교역은 크게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가지 주요 노선으로 조직되었다.
‘동양‘ 노선은 동남 연해 지역에서 풍향에 따라 대만으로 향했다. 거기서 북쪽의 일본과 이어지는 지선이 나오기도 했지만, 주된 흐름은 남쪽 필리핀으로 연결된 후, 더 남하하여 유럽인들에게는 향료제도(SpiceIslands)로 알려진 말루쿠 제도와 서쪽의 자바로 연결되었다.
‘서양‘ 노선은베트남 본토 해안을 끼고 가다가 타이만을 지나 믈라카까지 연결되었다.
복건성 월항 출신의 장섭(張變)은 1610년에 남중국해로 연결되는 두 가지 해양 노선을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동서양고(西洋)」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처럼 유럽인이 무역선을 이끌고 도래하기 전부터 남중국해에는 이미 다국적인 교역망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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