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이면.
- 베트남족 대 화교
- 화교와 보트피플
- 화교 지배층
공무원, 대학, 군대, 전문직 등을 베트남 지배층이 채우는동안 화교들은 상업과 기업 분야를 틀어 쥐고 있었다. 화교는 인구 비중은 매우 낮지만 남베트남 산업의 무려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유통, 금융, 교통 분야, 그리고 벼농사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화교가 장악했다. 서비스 분야에서도 인구 비례 대비 압도적으로 많은비중을 화교가 차지했다. 20세기 중반에 화교는 사이공 대형 호텔의50%, 소형 호텔의 90%를 소유하고 있었고 대형 식당 92곳, 차와 맥주78가게 243곳, 소형 식당 826곳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느 추산치에 따79르면 베트남 화교는 비유럽계 민간 자본의 90%를 장악하고 있었다. - P67
베트남 자본가 대부분은 베트남 사람이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화교를 연상시켰다. 자본주의에서 주로 이득을 얻는 이들이 화교로 보였기 때문이다. - P69
미국인들은1970년대 말에 ‘베트남 보트피플‘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44 이 베트남 난민 상당수가 사실은 화교라는 사실은 거의 혹은 전혀 듣지 못했다. - P75
제네바협정은 300일의 시간을 주고 모든 베트남 사람이 원하는 곳에 가서 살 수 있게 했다. 이때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은 12만 명이었는데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은 80만 명이나 됐다. 냉전의 전사 미국인들은 이 차이를 베트남 사람들이 두 발로 자본주의에 표를 던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민족 집단 간의 동학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와는 다른 그림이 나온다. 남쪽으로 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화교였다. (북부에 있던 화교의 압도적 다수가 남으로 내려왔다.) 베트남 사람 중에서 남으로 온 사람은 프랑스화된‘ 베트남 지배층을 포함해 공산 정권에서 박해를 받을까 봐 내려온 가톨릭교도들이었다.
300일간의 이주허용 기간이 끝날 무렵 화교의 압도적인 다수 (120만 명 중 100만 명)가 남베트남에 살게 됐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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