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C.11세기에 상나라 변방에 살았던 상족 이외의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주족을 중심으로 상나라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동맹군이 구성되는데, 이때 상나라를 공격하는 동맹군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 바로강족이었다. 결국 상나라 사람들의 불길한 예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강족은 주족과 함께 상나라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에는 주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후 고대 중국 사회에서 강족의 영향력은 결코 시든 적이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정치적·문화적으로 가장 강대했던 제齊나라가 바로 강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 P40

그래서 그들은 강상을 대표로 하는 강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래살았던 중국 서쪽을 떠나서 중국 동쪽, 즉 황해黃海를 바라보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쪽으로 옮겨가게 했다. 비록 말로는 강상을 제齊나라의 군주로 봉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것은 정치투쟁에서 실각한강족을 자신들 주족의 생활 터전에서 거의 축출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족에 대한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에 주족은 강족이 새롭게정착하게 된 제나라와 자신들의 주나라 사이에 노나라와 위衛나라를 겹겹이 만들고 그 군주의 자리에 자신들의 동족을 부임시켰을 정도였다. - P44

고대 중국에서 ‘인‘과 ‘민‘, 혹은 ‘백성‘과 ‘민‘이 각각 상이한 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주나라의 통치가 왜 예와 형刑이란 두 가지 수단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다. 예禮가 통치 계급, 즉 동성同姓의 귀족들이나 이성異姓의 귀족들을 포함한 지배층 내부에 통용되는 행위규범이었다면, 형 즉형벌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던 민중, 즉 민民에게 적용되던 가혹한 형법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주나라는 ‘예‘라는 행위규범만으로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했던 이상적이고 훌륭한 사회가 결코아니었다. 예기禮記」20) 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이런 의문에 응답해줄흥미로운 구절이 나타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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