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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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부식되지 않고 여전히 눈부신 것들이 있다. 시간을 무용하게 만들어 그 지배를 거부하는 것들, 그래서 감탄을 불러오는 것들. 그 하나를 만났다. 김영하의 이 소설이 그렇다. 이렇게 냉소적이고 나른하며 감각적이라니. 뒤표지의 도서평에 나온 "스타일리시하다. 뻔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먼 작품"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소설이 출간됐을 당시 사용됐던 책 속의 기기들을 지우고 오늘날 쓰는 기기들을 대입하면 시간차를 못 느낄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책을 이제서야 만나다니. , 비감하여라.     

 

문유석의 쾌락 독서에 따르면 이 소설은 개과와 고양이과의 글 중, 단연 고양이과 글의 표본이다. 1996년 출간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크고 작게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내게 있는 책은 2014년에 나온 38쇄본이다. 책은 크게 세 번 탈바꿈을 하는데, 첫 번째 두번째 표지는 목차에 나온 제목의 그림들이다. 두 표지는 고전적이고 묵중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세 번째 표지는 가볍고 몽환적이다. 

 

이제껏 책을 읽으며 주연이 책이었다면 작가는 대개 조연이었다. 더 알면 낫고 이 상태로 있어도 그만인. 그런데 이 책을 읽고는 김영하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이곳저곳을 뒤졌다. 201587일자 한 도서 웹진에서는 김영하를 "도시적 감수성을 냉정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가"로 소개한다 

 

"보편성을 담보하는 소설의 주제의식과 트렌디한 소재를 통해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저자 특유의 통찰력과 문제의식으로 전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소설가 김영하. 단편들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 타인과의 연대에 대한 무능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명쾌하고도 아이러니하게, 또한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며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장편들에서는 독자들에게 늘 새로운 실험을 선보여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그 자장 안에서 이해된다. 화자는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도와주는 일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 그의 고객이었던 여성들은 유디트와 미미이며, 고객은 아니었지만 해외 여행지에서 잠시 만난 그녀라 불리는 홍콩 여성이 있다. 유디트는 화자 C의 여자로 한 때 그의 동생 K의 여자였다. 유디트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여자도 아닌 1,2,3으로 지칭되는 남자들 중 하나였겠지만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을 삶의 신산은 나이와는 무관하다. 그녀들은 이십을 넘은지 얼마 안 됐거나 삼십 안팎인데도 무감하고 무미한 느낌을 준다. 선이나 경계가 무너진 일상의 반복으로 매사가 심드렁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내면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극도의 분노가 있다. 그녀들에게 죽음은 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C가 왜 남의 죽음에 개입하는 일을 하게 됐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동생 K의 입장에서 C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람이다. K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가져가고도 가져간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미안함도 없다. C는 마침내 K의 여자 유디트마저 빼앗아간다 

 

처음 너랑 자던 날 말야. 내가 사탕을 먹고 있었던 것 기억나? 난 네가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던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게임을 해본 거야. 사탕에 넘어오는지, 아님 그 다음에 넘어오는지, 난 그게 궁금했어.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내기를 걸었지. 내가 사탕을 다 먹기 전에 네가 넘어오면 너랑 살고, 그다음 단계에서 넘어오면 K랑 살기로. 어때, 재밌지 않아?” 35  

 

유디트는 섹스를 하면서도 추파춥스를 먹는다. 홍콩 여자 그녀는 물을 먹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물을 마시면 구토가 나오기 때문이다. 미미는 그 바닥에서 이름난 행위예술가다. 매혹적인 것만큼 파괴적이라 경계해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촬영을 불허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어쩐 일인지 이번 C의 협작 제안에 흔쾌히 응한다. 미미와 유디트는 외견상 공통점이 없는데도 닮아있다.

 

총알택시를 운전하는 K는 스피드에 광적으로 자신을 던진다. 지난 5년간 자신을 지탱케 한 것은 스피드였다. 그러나 유디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자신에게 더 이상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튜닝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K는 유디트 아니 세연이를 만나야겠다며 자신의 택시에 오른 후 스피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 

 

C의 도움으로 의뢰인 유디트도, 미미도 갔다. 그녀들은 주체할 수 없는 삶으로부터 해방되길 원했고, 모순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더 이상 상실할 것이 없는 그녀들은 방임으로 가장된 삶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생의 막을 내린다. 이야기도, 전달되는 느낌도 다른데 김영하의 살인자의 건강법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김영하의 글은 직선으로 달릴 때 가장 빛난다.

 

자살은 '제대로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는 몸의 이야기다. 김영하는 이 시대의 비루한 일상을 조명한 후, 오늘 이 자리에서 휘발케 한다. "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바빌로니아를 떠날 것이다. 비엔나 여행에서처럼 그곳에도 미미나 유디트 같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C는 '자신의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처럼 자신의 인생이 한없이 무료하다'고 건조하게 말한다. 덧붙여 '이제 쉬고 싶다'고까지 한다. 여일한 것이 인생이며 아무리 반짝거려도 조화는 잎파리 하나도 내지 못한다. 이런 비산(飛散)이야말로 김영하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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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 한 줄 써봅시다 -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아주 쉽고 단순한 하루 3분 습관
김민태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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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내놓을만한 경력은 그 시간들이 만들어 주었지만, 내게는 인생의 아픈 흑역사였다. 못 써도 어찌 그리 못 쓰는지 죽을 맛이었다. 그만둘 수만 있다면 당장 그만두었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탄식을 하며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남들은 잘도 쓰러지더만 내 몸은 왜 이리 건강하냐’는 무언의 절규를 수도 없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의식의 고매함은 찾을 수 없고, 밥벌이의 곤혹스러움에 늘 발은 종종 대고 마음만 바빴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라고 말한 김훈의 글은 당시의 내게는 멀어도 너무 먼 그대였다. 일을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자 그 기회를 잡아채 밥벌이로써의 글쓰기와 별리를 만들었다. 지금에 비하면 가소롭지만 나이도 조금 먹었겠다, 누가 나를 막으랴. 모든 부담과 짐을 내려놓은 듯한 안도감을 느끼며 그 시절의 막을 내려버렸다.


글쓰기가 뭐길래, 글쓰기가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나마 잡문이나마 끄적거리며 기쁨을 누리게 된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 기적에 글쓰기 안내서도 한 몫 했는데, 산문의 최고봉 이태준과 이제는 드라마 작가 홍자매의 아버지로 더 알려진 소설가 홍성원, 서울대 박동규 교수의 책이 길 안내를 해주었다. 그 후로도 많이는 아니지만 간간이 읽곤 했는데 크게 두 갈래로 갈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용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두루뭉술 이런 저런 글들을 가져와 킬링 타임식으로 엮어 내는 경우도 있더란 거다.


『일단 오늘 한줄 써봅시다』는 많은 글쓰기 안내서 중 특별한 상큼함으로 다가온 책이다. 저자 김민태는 글쓰기의 실용적인 부분도 전달하지만 글쓰기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를 진심을 다해 전한다. 다른 책들이 실효성에 치중했다면 이 책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한다. 당장은 기능적인 면이 우세해 보이지만 장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과물의 도출은 본질이 답을 쥔다.


김민태는 “글쓰기를 통해 진짜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글쓰기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키는지를 전한다. 글쓰기는 나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작업이자 자기 안의 타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며, 결국은 자신을 위해 쓰는 행위라 규정한다. 글을 쓸수록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게 돼 솔직하게 쓰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솔직해야 치유의 힘이 강해진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저자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심리치료사인가? 무슨 말씀을! 김민태는 EBS의 스타 PD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자. <다큐 프라임>, <시대의 초상>, <아이의 사생활> 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프로그램이지 않나!


그가 쓴 책도 있다. 『아이의 자존감』, 『나는 고작 한번 해봤을 뿐이다』, 『부모라면 그들처럼』 이밖에 그는 강의도 나가고 사람을 부추기는데도 뛰어나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좋은 일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기획이 숨어있다. 현재 김민태는 EBS 모바일 육아학교 총괄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일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왜 김민태는 굳이 글쓰기 관련 책을 썼을까? 프롤로그에 쓰인 글을 보자. “글쓰기는 대박이야. 인생이 바뀌어. 그러니까 그냥 막 써 봐. 봐주는 사람 없으면 페북에 써. 쓰다 보면 주제는 나와. 전문성 없어도 돼.”


글쓰기에 재미를 느끼는 순간 삶이 마법처럼 변하는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라고 했다. 글을 썼더니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커졌고, 정서적으로 좋아졌으며, 새로운 관심사가 계속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시렸던 내 이십대를 떠올려 본다. 그 때 글쓰기가 밥벌이가 아니라 친구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아니라 지우고 싶지 않은 짝사랑 같진 않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잘 쓴다는 말은 못 들어도 오히려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기 전엔 해 본 적 없는 생각이다. 모든 좋은 것은 나눠야 한다. 그래서 나도 감상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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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트 - 새로움을 만드는 창조의 명령어
김유열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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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에너지를 몸 안에  채운 후, 누르고 눌러 터질 듯한 기운으로 쓰여진 글은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이런 글에선 치장된 겸손도, 자의식의 과잉도 찾을 수 없다. 세상적인 제스처가 무용하기 때문이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고,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게 있다. 폭발할 듯한 불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사람의 글은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설혹 그에게 저항감이 생긴다해도, 그가 진리의 한 조각에 포박되어 있다면 그의 글에 결코 야박할 수 없다.

 

몇 년 전 철학자 강신주가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쓴 것은 김수영의 인문 정신이었지만 내가 읽은 것은 김수영을 향한 강신주의 지독한 사랑이었다. 김수영에 대한 강신주의 사랑은 짙고 붉었다. 소년처럼 순수했고 중년처럼 찐득했으며 집요하기까지 했다. 강신주는 그 책을 김수영에게 바쳐지는 조사나 묘지명이라 했지만, 내게는 김수영에 대한 연서로 읽혀졌다.

 

『딜리트』를 읽으며 대상과 결은 다르지만 저류에 흐르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자 김유열을 추동케한 '딜리트'는 무엇이었을까? 기획출판이라는 이름 하에 몇 개월만 틀어박혀 쓰면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5년이란 시간과 3천 매가 넘는 초고의 많은 부분을 버려가며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문장을 잘라낼 때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김유열은 생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원고를 줄여 더 강력하게 무장했다고 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을 유배했을 것이고 독촉했을 것이며, 미련하도록 한 우물만 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딜리트』는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본래 말의 힘은 뜻에 있지만, 요즘처럼 말이 한 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시대에는 그 말대로 살아온 시간에 비례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그가 하는 행동을 보라'는 말은 언어의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가 잡을만한 금언이 된다. 힘주어 말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창하는 대로 살았어야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말의 힘은 유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힘을 실어준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유열은 '딜리트'를 주창할 만하다. 그는 남을 설득하기 전에 자신을 설득했고, 자신을 설득했기에 자신의 원하는 바를 직장 내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대로 김유열은 EBS의 PD다. 한때 EBS는 시청률이 거의 나오지 않는 방송이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방송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누군가 사활을 걸고 총대를 매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유열은 선봉장이 되었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던가. 그는 딜리트에 주목하고, 딜리트로 정비한 후, 딜리트로 나아갔다. 흔히 딜리트는 '제거하다, 삭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이 책에서는 '단순화하다, 파괴하다, 해방시키다, 반항하다' 등의 여러 의미를 포괄한다. 딜리트는 무언가를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을 수행한다. 인간은 무언가가 없어지면 빈 곳에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로 채우려는 특성 때문에 딜리트는 창조의 계기가 된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즉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되는 것, 이것이 바로 딜리트의 신비다.

 

김유열은 딜리트가 여러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며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는 완벽한 딜리터로 피카소를 소개했고,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저항했던 반항아 혹은 이단아로 스티브 잡스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을 들었다. 또한 고향을 제거했던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딜리트가 운명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도 선사한다고 했다.

 

김유열은 딜리트만 잘해도 삶을 변혁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딜리트는 진중한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며, 즉시 떠오른 생각을 편안하게 적어보기만 해도 무언가가 새롭게 떠오른다고 했다. 부담스런 일이 많은 세상에서 더하는 것이 아닌, 덜고 비우는 마이너스의 미학을 통해 시대를 꿰뚫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딜리트의 유용성은 덜어내기만 해도 그 자리에 자동적으로 창조적인 생각이 들어선다는 점이다.

 

김유열은 일터에서의 성공을 통해 누구보다 딜리트의 위력을 맛본 사람이다. 비우고 버리는 것을 통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었고, 방송 현장에서 딜리트의 폭발적인 힘을 체감했다. 세 번의 편성기획부장을 맡으며 EBS를 교육과 다큐멘터리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결과 EBS는 평균 시청률 0.6%에서 프라임 타임대 시청률이 600% 가까이 오르는 고도성장을 했다. 이뿐 아니다. 수상 실적 1,000% 상승이라는 기록적인 고공행진도 이뤘다. 게다가 유아 어린이 시청률 1위를 거머쥐었고,올해에는 미디어 신뢰도 2위까지 차지했다.

 

딜리트는 가시적인 효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우아함도 배가시킨다. 그의 뮤즈 오드리 헵번은 덜고 더는 것을 통해 귀족적인 우아함이라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했고, 샤넬은 유행을 넘어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딜리트의 최대 장점은 본질을 이해하고 본질에 집중케 하는 힘을 키워준다는 데 있다. 덜어냄으로 인해 비어진 공간이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는 기쁨은 딜리트 밖에 없다. 게다가 효과는 파격적이고 극적이다. 이 밖에도 딜리트의 성공 사례들은 이 책에 넘치게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인식이 곧 위로'라고 했다. 정확한 인식만이 정확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딜리트』는 정확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 이제 이 시대의 통찰까지 담고 있다. 노장의 무위사상과 니체의 니힐리즘을 근간으로  『딜리트』는 현장 경험과 그 속에서 나타난 실질적인 결과물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자신있게 우리를 설득한다. 딜리트만 잘해도 창조할 수 있고, 혁신할 수 있으며, 개척하고, 개혁할 수 있다고.

 

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갈수록 속도는 느리고 매너리즘에 발목 잡혀 있는가. 달라져야 한다고 매일 결심하면서도 금새 하루를 놓쳐버리고 저녁이면 후회하는가. 이럴 때 '지금, 여기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딜리트의 도움을 받아보면 좋겠다. 

우리를 대신해 한 권이 책이 된 사람의 이야기이니 신뢰할만하겠다. 만일 시간의 검증만 통과한다면 이 책은 이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당신이 읽고 딜리터가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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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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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뒷북 스타일이라 세월이 흘러도 한참 흐른 후, 좋은 무언가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당시 뭘 하느라 이런 걸 놓치고 살았나 하는 후회를 조금 한다. 그리고는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라며 긍정주의자 행세를 한다. 안 그러면 속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동명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끝난 후 여주인공이었던 배우가 예능 프로에 나와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말하며 소개하길래, 어떤 드라마였는지 궁금해 VOD로 역주행해 보다 원작이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다.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서 올린 동영상이니 재미없을 수가 없고, 남녀 주인공들의 빼어난 외모와 개성있는 조연들의 활약이 원작에 대한 궁금증을 더 부추겼다. 지금껏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원작보다 나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원작에 대한 기대가 자꾸 커졌다. 게다가 원작자가 쓴 극본이란다. 거참 대단할 일이세! 판사가 드라마 대본을 썼다니!

 

원작자인 문유석 판사의 책은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서 읽지 못하고 있었다. 뒷북 스타일이라고 했지만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신간을 두고 굳이 예전에 나온 책을 읽기는 주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관심이 있었던 터라 『미스 함무라비』를 겁나 빠르게 읽어 젖혔다. 드라마를 주마간산이라도 훑었으니 내용은 거의 다 아는 터이고, 나도 모르게 비교하면서 읽게 되더라. 책의 내용을 드라마가 좀 더 입체적으로 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책이 좀 밋밋했달까.  

 

『미스 함무라비』 대본집에 쓴 작가의 말에 따르면, 문유석 판사가 파죽지세로 3회까지 극본을 쓴 후 의기양양해 있었는데, 제작사의 주선으로 만난 김은숙 작가가 하나하나 짚으며 세세한 조언을 했단다. 이 조언을 듣고 극본을 썼으니 캐릭터를 얼마나 잘 살렸을까? 예전에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른 걸 해도 깊게 잘 하더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유석 판사도 그런 것 같다. 박차오름역을 맡은 고아라가 약간 과하면서 귀여운 감이 있다면, 한세상역을 맡은 성동일은 부장 판사의 고뇌와 생의 어쩔수 없음을 때론 괴팍하게, 때론 깊고 섬세하게 구현했다. 책이 단선적이고 칼날 같았다면 드라마는 입체적이고 좀 더 친근했다.

 

법정 활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처럼  『미스 함무라비』는 신임 여판사의 좌충우돌 정의 구현기다. 그러니 불협화음이 나고 조직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데, 이를 우배석 임바른 판사와 한세상 부장 판사가 같이 욕 먹고 함께 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세상을 살아보니 짧고 굵은 것도 중요하지만, 가늘고 긴 것이 모양은 빠져도 더 의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짠'하고 한두 번 뭔가를 한 후 사직서를 내며 자폭하기 보다는, 변할 때까지 꾸준히 표도 안 나는 뭔가를 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것도 나이 들어서야 하게 된 생각이지만.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세상의 비리와 바뀌지 않는 많은 것들, 옳지 않은 것들과 인간의 지독스런 추함, 그런 시궁창 속에서도 피어나는 거친 인간애는 여러 감정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다 알 법한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바닷가에 뒤집혀 있는 수많은 불가사리를 보고 한 어린아이가 꼬물대며 하나씩 다시 뒤집어 주었단다. 여기서 불가사리는 다른 어떤 생명체로도 대체될 수 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란다. 그깟 몇 마리 뒤집어서 뭔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러자 아이가 이 많은 불가사리를 다 살릴 수는 없지만 방금 자신이 뒤집은 저 불가사리는 살았다며 가리키더란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 그래도 이나마 지탱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고아라와 그녀를 사랑해서 어쩔 수없이 변하게 된 임바른과 적잖은 컴플렉스를 가진 한세상은 소설에서나마 살맛나는 세상을 선보여준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에돌려 말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위해서고, 이왕 살거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일조한다. 소설적인 측면에서는 보완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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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천 년을 사는 아이들
토르비에른 외벨란 아문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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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북유럽은 아직도 좀 멀다. 지구촌이라지만 지역적으로 멀면 심정적으로도 거리를 내기 때문인 듯하다. 요새는 스칸디나비아 삼국 외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까지도 북유럽에 포함시킨단다. 그 중 가장 멀리 느껴지는 곳을 들라면 내게는 노르웨이가 그렇다. 덴마크는 어릴 때부터 튜울립과 풍차의 나라로 친근했고, 스웨덴은 아바와 볼보 덕에 거리를 넘어뛸 수 있었으며, 핀란드는 구한 말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땅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까울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꽃보다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 일방적으로 친분을 텄다. 


이제 남아있는 나라는 노르웨이. 딱히 연결점이 없다. 굳이 찾자면 2011년 극우파 청년이 참사를 일으켰던 나라라는 정도! 아, 참 요네스 뵈가 있었지? 요네스 뵈의 『스노우맨은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과 더불어 덜덜 떨면서 읽었던 책이다. 그가 노르웨이 작가라는 걸 잊고 있었다. 오늘부터 가깝게 여기기 1일!

 

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 같다. 다소 개인차는 있지만 태양이 작렬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개방적이다. 반면 날이 춥거나 습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하거나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북유럽처럼 사회적으로 안정된 곳은 삶이 단조로워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소설은 삶과 반비례하여 환상과 스릴러가 넘치는 듯하다. 그 노르웨이의 판타지 소설이라니 구미가 얼마나 땡기든지...

 

환생을 거듭하며 사는 아이들이 있다. 열네 살 생일이 되면 죽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아이들은 수천 년에 걸친 환생을 되풀이하고 있다. 아이들은 삶에 대해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며, 어느 때는  광기와 혼란스러움마저 느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운명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받아들인다. 그러던 어느날 지구상에 있는 421명의 선택된 아이들 중 한 아이 아르투르가 열네 살이 지났는데도 어제와 동일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 아침 자신은 갓난아기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또 다른 아이 파울로가 있다. 파울로의 머리 속에는 끝모를 외로움과 고통스런 기억밖에 없다. 파울로는 이런 상황을 다시 맞지 않으려 지구라는 공간을 아예 없애버리려 한다. 그래야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영원히 죽을 수 있으니까. 파울로의 바람은 강렬하다. 파울로는 이미 행동에 나섰고 저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너새니얼은 위성 사용권 때문에 고민이다. 시간적 공간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방해전파를 특정 형태로 배치하려는 그의 프로젝트가 과도한 전력 소비로 인해 중단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새니얼은 지구 상에 반짝이는 421개의 하얀 점들을 계속 추적하고 싶고, 그 점들이 인간임을 알고 있다. 위성 사용권이 있어야 연구를 계속할 수 있기에 너새니얼은 지인인 소렌슨 박사의 조언을 받아 어떤 한 기업과 자신의 프로젝트를 연계한다.

 

너새니얼이 계약한 곳은 아르투르와 같은 아이들이 만든 단체다. 이 단체는 파울로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너새니얼을 아르투르와 만나게 하고, 둘은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해 서로를 조율한다. 이제 파울로의 움직임은 속도를 더하고 있고, 파울로 곁에는 특별한 힘을 가진 메르세르와 그녀가 고용한 지질학자들이 있다. 지키려는 자들과 파괴하려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고, 그들 곁에는 삶과 죽음이 상존한다. 

 

책에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가 있고, 로마 숫자로 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세 이야기들은 맞물려 있으며, 각기 다른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느린듯 빠르게 좁혀오는 이야기 뒤에는 소리없는 절규와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고 있다. 삶이란 작은 행복과 긴 슬픔이 교차하는 것이며, 작은 행복을 위해 긴 슬픔은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일테다. 판타지임에도 말미 너새니얼의 편지를 읽으며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무릇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듯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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