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트 - 새로움을 만드는 창조의 명령어
김유열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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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에너지를 몸 안에  채운 후, 누르고 눌러 터질 듯한 기운으로 쓰여진 글은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이런 글에선 치장된 겸손도, 자의식의 과잉도 찾을 수 없다. 세상적인 제스처가 무용하기 때문이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고,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게 있다. 폭발할 듯한 불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사람의 글은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설혹 그에게 저항감이 생긴다해도, 그가 진리의 한 조각에 포박되어 있다면 그의 글에 결코 야박할 수 없다.

 

몇 년 전 철학자 강신주가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쓴 것은 김수영의 인문 정신이었지만 내가 읽은 것은 김수영을 향한 강신주의 지독한 사랑이었다. 김수영에 대한 강신주의 사랑은 짙고 붉었다. 소년처럼 순수했고 중년처럼 찐득했으며 집요하기까지 했다. 강신주는 그 책을 김수영에게 바쳐지는 조사나 묘지명이라 했지만, 내게는 김수영에 대한 연서로 읽혀졌다.

 

『딜리트』를 읽으며 대상과 결은 다르지만 저류에 흐르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자 김유열을 추동케한 '딜리트'는 무엇이었을까? 기획출판이라는 이름 하에 몇 개월만 틀어박혀 쓰면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5년이란 시간과 3천 매가 넘는 초고의 많은 부분을 버려가며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문장을 잘라낼 때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김유열은 생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원고를 줄여 더 강력하게 무장했다고 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을 유배했을 것이고 독촉했을 것이며, 미련하도록 한 우물만 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딜리트』는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본래 말의 힘은 뜻에 있지만, 요즘처럼 말이 한 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시대에는 그 말대로 살아온 시간에 비례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그가 하는 행동을 보라'는 말은 언어의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가 잡을만한 금언이 된다. 힘주어 말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창하는 대로 살았어야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말의 힘은 유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힘을 실어준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유열은 '딜리트'를 주창할 만하다. 그는 남을 설득하기 전에 자신을 설득했고, 자신을 설득했기에 자신의 원하는 바를 직장 내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대로 김유열은 EBS의 PD다. 한때 EBS는 시청률이 거의 나오지 않는 방송이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방송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누군가 사활을 걸고 총대를 매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유열은 선봉장이 되었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던가. 그는 딜리트에 주목하고, 딜리트로 정비한 후, 딜리트로 나아갔다. 흔히 딜리트는 '제거하다, 삭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이 책에서는 '단순화하다, 파괴하다, 해방시키다, 반항하다' 등의 여러 의미를 포괄한다. 딜리트는 무언가를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을 수행한다. 인간은 무언가가 없어지면 빈 곳에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로 채우려는 특성 때문에 딜리트는 창조의 계기가 된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즉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되는 것, 이것이 바로 딜리트의 신비다.

 

김유열은 딜리트가 여러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며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는 완벽한 딜리터로 피카소를 소개했고,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저항했던 반항아 혹은 이단아로 스티브 잡스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을 들었다. 또한 고향을 제거했던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딜리트가 운명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도 선사한다고 했다.

 

김유열은 딜리트만 잘해도 삶을 변혁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딜리트는 진중한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며, 즉시 떠오른 생각을 편안하게 적어보기만 해도 무언가가 새롭게 떠오른다고 했다. 부담스런 일이 많은 세상에서 더하는 것이 아닌, 덜고 비우는 마이너스의 미학을 통해 시대를 꿰뚫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딜리트의 유용성은 덜어내기만 해도 그 자리에 자동적으로 창조적인 생각이 들어선다는 점이다.

 

김유열은 일터에서의 성공을 통해 누구보다 딜리트의 위력을 맛본 사람이다. 비우고 버리는 것을 통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었고, 방송 현장에서 딜리트의 폭발적인 힘을 체감했다. 세 번의 편성기획부장을 맡으며 EBS를 교육과 다큐멘터리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결과 EBS는 평균 시청률 0.6%에서 프라임 타임대 시청률이 600% 가까이 오르는 고도성장을 했다. 이뿐 아니다. 수상 실적 1,000% 상승이라는 기록적인 고공행진도 이뤘다. 게다가 유아 어린이 시청률 1위를 거머쥐었고,올해에는 미디어 신뢰도 2위까지 차지했다.

 

딜리트는 가시적인 효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우아함도 배가시킨다. 그의 뮤즈 오드리 헵번은 덜고 더는 것을 통해 귀족적인 우아함이라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했고, 샤넬은 유행을 넘어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딜리트의 최대 장점은 본질을 이해하고 본질에 집중케 하는 힘을 키워준다는 데 있다. 덜어냄으로 인해 비어진 공간이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는 기쁨은 딜리트 밖에 없다. 게다가 효과는 파격적이고 극적이다. 이 밖에도 딜리트의 성공 사례들은 이 책에 넘치게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인식이 곧 위로'라고 했다. 정확한 인식만이 정확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딜리트』는 정확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 이제 이 시대의 통찰까지 담고 있다. 노장의 무위사상과 니체의 니힐리즘을 근간으로  『딜리트』는 현장 경험과 그 속에서 나타난 실질적인 결과물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자신있게 우리를 설득한다. 딜리트만 잘해도 창조할 수 있고, 혁신할 수 있으며, 개척하고, 개혁할 수 있다고.

 

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갈수록 속도는 느리고 매너리즘에 발목 잡혀 있는가. 달라져야 한다고 매일 결심하면서도 금새 하루를 놓쳐버리고 저녁이면 후회하는가. 이럴 때 '지금, 여기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딜리트의 도움을 받아보면 좋겠다. 

우리를 대신해 한 권이 책이 된 사람의 이야기이니 신뢰할만하겠다. 만일 시간의 검증만 통과한다면 이 책은 이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당신이 읽고 딜리터가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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