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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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뒷북 스타일이라 세월이 흘러도 한참 흐른 후, 좋은 무언가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당시 뭘 하느라 이런 걸 놓치고 살았나 하는 후회를 조금 한다. 그리고는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라며 긍정주의자 행세를 한다. 안 그러면 속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동명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끝난 후 여주인공이었던 배우가 예능 프로에 나와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말하며 소개하길래, 어떤 드라마였는지 궁금해 VOD로 역주행해 보다 원작이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다.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서 올린 동영상이니 재미없을 수가 없고, 남녀 주인공들의 빼어난 외모와 개성있는 조연들의 활약이 원작에 대한 궁금증을 더 부추겼다. 지금껏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원작보다 나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원작에 대한 기대가 자꾸 커졌다. 게다가 원작자가 쓴 극본이란다. 거참 대단할 일이세! 판사가 드라마 대본을 썼다니!

 

원작자인 문유석 판사의 책은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서 읽지 못하고 있었다. 뒷북 스타일이라고 했지만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신간을 두고 굳이 예전에 나온 책을 읽기는 주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관심이 있었던 터라 『미스 함무라비』를 겁나 빠르게 읽어 젖혔다. 드라마를 주마간산이라도 훑었으니 내용은 거의 다 아는 터이고, 나도 모르게 비교하면서 읽게 되더라. 책의 내용을 드라마가 좀 더 입체적으로 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책이 좀 밋밋했달까.  

 

『미스 함무라비』 대본집에 쓴 작가의 말에 따르면, 문유석 판사가 파죽지세로 3회까지 극본을 쓴 후 의기양양해 있었는데, 제작사의 주선으로 만난 김은숙 작가가 하나하나 짚으며 세세한 조언을 했단다. 이 조언을 듣고 극본을 썼으니 캐릭터를 얼마나 잘 살렸을까? 예전에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른 걸 해도 깊게 잘 하더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유석 판사도 그런 것 같다. 박차오름역을 맡은 고아라가 약간 과하면서 귀여운 감이 있다면, 한세상역을 맡은 성동일은 부장 판사의 고뇌와 생의 어쩔수 없음을 때론 괴팍하게, 때론 깊고 섬세하게 구현했다. 책이 단선적이고 칼날 같았다면 드라마는 입체적이고 좀 더 친근했다.

 

법정 활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처럼  『미스 함무라비』는 신임 여판사의 좌충우돌 정의 구현기다. 그러니 불협화음이 나고 조직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데, 이를 우배석 임바른 판사와 한세상 부장 판사가 같이 욕 먹고 함께 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세상을 살아보니 짧고 굵은 것도 중요하지만, 가늘고 긴 것이 모양은 빠져도 더 의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짠'하고 한두 번 뭔가를 한 후 사직서를 내며 자폭하기 보다는, 변할 때까지 꾸준히 표도 안 나는 뭔가를 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것도 나이 들어서야 하게 된 생각이지만.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세상의 비리와 바뀌지 않는 많은 것들, 옳지 않은 것들과 인간의 지독스런 추함, 그런 시궁창 속에서도 피어나는 거친 인간애는 여러 감정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다 알 법한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바닷가에 뒤집혀 있는 수많은 불가사리를 보고 한 어린아이가 꼬물대며 하나씩 다시 뒤집어 주었단다. 여기서 불가사리는 다른 어떤 생명체로도 대체될 수 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란다. 그깟 몇 마리 뒤집어서 뭔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러자 아이가 이 많은 불가사리를 다 살릴 수는 없지만 방금 자신이 뒤집은 저 불가사리는 살았다며 가리키더란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 그래도 이나마 지탱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고아라와 그녀를 사랑해서 어쩔 수없이 변하게 된 임바른과 적잖은 컴플렉스를 가진 한세상은 소설에서나마 살맛나는 세상을 선보여준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에돌려 말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위해서고, 이왕 살거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일조한다. 소설적인 측면에서는 보완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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