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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성프란시스대학 편집위원회 엮음 / 삼인 / 2020년 10월
평점 :
가을이 스러지고 있다. 겨울이 멀지 않다는 신호다. 마음이 이미 추워버린 올 겨울은 나기 쉽지 않을 성싶다. 없는 이에게 겨울은 혹독하다. 없는 이 중 진짜 없는 이, 몸 하나 누일 방 한 칸 없이 한뎃잠을 자야하는 노숙인들은 올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들에게 겨울나기는 생명살이다. 거리에서 잠을 자는 자체가 위험한 환경의 다른 이름이니까. 이들에게 죽음은 늘 따라다닌다. 추운 겨울 거리로 내몰리면 천하장사라도 목숨을 지킬 방법이 없다. 설사 어찌 목숨을 건진다해도 건강이 좋을 수 없다. 그렇게 이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러나 추운 겨울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와 멸시의 눈초리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보이지 않는 생각, 생을 방기했으니 자초한 결과라는 묵음의 아우성 등이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들도 안다. 삶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런 노숙인들을 위해 성프란시스대학에서 2005년부터 인문학 과정을 개설해 자활을 돕고 있다. 1년 과정에 주 3회, 2시간씩 문학과 역사, 철학과 예술사, 글쓰기 등을 가르친다.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는 1기부터 15기까지의 학생들이 쓴 글들을 모으고 선별해 꾸민 책이다.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요즘 나는 눈물이 많아졌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계속 눈물이 난다. 글쓰기를 하자니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울컥해진다."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83쪽
"나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로 나를 감싸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변명들로 나를 정당화 시키고 있었는지 아픈 것만큼 부끄러웠다. 하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나를 감싸고 있던 거짓말들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야 하고 변명들 대신 난 나의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기에 당당히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뜨고 있기로 했다. 그래야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을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거울 앞에서, 173쪽
이토록 섬세한 감정 표현과 투명하게 자신을 보려는 노력이 어떻게 이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지 놀라고 만다. 내 선입견 속의 이들은 지저분하고 냄새를 피우며 알콜중독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도대체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누가 더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지 않나.
내처 읽었다. 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이야기, 그리운 가족에 대한 이야기, 믿는 이에게 배신을 당한 이야기, 노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맞은 이야기, 뻔뻔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더니 불편해 어쩔줄 모르는 영 수줍은 이야기 등 170여편에 가까운 글들이 한 인간의 서사를 드러내며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인문학이 아니었으면 자신 속에 있는 보석같은 이야기와 성찰의 능력을 어찌 알았을까.
"사실 노숙인이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거다. 어디 가서 물어봐라. 노숙인이 인문학 한다고 하면 욕이나 먹지.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꼴값 한다고 다들 수군거리지 않겠는가. 나도 인문학을 배우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니었다.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생활을 완전히 탈바꿈 시켜준다. 삶, 그 자체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학문을 배우면서 참된 진리를 배우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깨닫는다. 남들과 다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동료들 사이에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철학을 배운다, 185쪽
인문학을 배우며 이들은 더 이상 노숙인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생기면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지 집이 없을 뿐이고, 남들보다 가진 것이 적을 뿐이다. 거리로 내몰렸지만 쪽방 한 칸일망정 돌아갈 집을 구하고 내일을 향한 소박한 꿈을 키우고 있다. 내 일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고 자각하고 있고, 사소한 것도 자꾸 자신에게 물어보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작은 시작에 함께 하고자 나도 꾹꾹 눌러 책을 읽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응원해본다. “지금보다 더 영웅적이고 전투적으로 사세요”라고. 질투심을 누르고 마지 못해 한 마디 더 덧붙이며. "글 참 좋네요. 저보다 더 잘 쓰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