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역에서 ㅣ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 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사랑이 타고 남은 자리엔 슬픔이 떨어져 있다.
어쩌면 시작했을 때부터 슬픔은 배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와 처음 만났을 때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가 살며시 겹쳐졌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도입부의 느낌은 영 반대였는데도 이 시가 떠올랐다.
사랑시에 담긴 느낌 때문인지 기시감마저 들었다.
아마 기다린다는 말이 중심어여서 그랬던 듯하다.

하지만 황지우의 시와 정호승의 시는 다르다.

황지우의 시는 초반 기다림의 설렘과 조바심을 드러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불안함을 너를 맞으러 가는 마음의 길로 치환하여 적극적으로 그린다.
반면 정호승의 시는 이별의 아픔과 재회를 염원하는 마음을 곡진하게 그리고 있다.

사랑은 어쩌면 슬픔과 이란성 쌍동이인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고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은 화자를 강변역으로 부른다.
태어나고 자라며 성숙하고 쇠퇴해 마침내 스러지는 인생처럼, 사랑도 그렇다는 걸 화자는 간과했다.
그토록 생명력으로 충만했던 사랑이 시들어버린 꽃잎처럼 버려지게 될 걸 상상이나 했으랴.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화자는 또 강변역으로 간다.
<행복>이라는 시에서 유치환이 말한 것처럼 화자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어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그녀를 떠나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강변역에서의 화자는 오늘도 여전한 사랑으로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린다.
어쩌면 그의 사랑은 그의 인생과 같을 것이므로.
설령 뜻대로 되지 않아도 여전히 생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의 사랑도 그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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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새벽에 ㅣ 박재삼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 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

땟국에 절은 듯한 시들이 있다.
눈물이 연필이 되어 절절하게 쓰여지는 시들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 막히고 땀이 흐르는데
부모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끼리만 있었던 듯하다.

한여름의 더위는 폭력적이다.
더위엔 어른들도 속수무책이다.
그 더위를 아이들이 무방비 상태로 견뎠지 싶다.

어떻게 지냈을까.
애비의 마음은 무너진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삶의 비희를
어찌 말로 다하랴.

마디에 옹이가 박힌 손으로 아이들을 어루만진다.
애비는 이제 또 나가야한다.

그러나 이 슬픔은 한시적이다.
아이들은 잘 자라 스스로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먹고 자란 더위는 삶의 질료가 되어
애비에게도 굳건하게 뿌리 내린 비상(飛上)이 될 것이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35676960170211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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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ㅣ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창작과비평, 2018
.......

어딘들 쉬운 삶이 있겠는가마는 하늘마저 검다는 탄광촌엔 서러움이 켜켜로 쌓여있다.
먹을 것을 캐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사내들은 바짝 선 신경을 감당하지 못해 취기를 빌린다.

가난은 아이들을 빨리 자라게 한다. 아이들의 눈치는 백단이다.
아이들은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씩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아빠가 울지 못한 울음을 아이들의 심장이 대신해 울기 때문이다.

광부들의 사인이 매몰에 의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닌 익사라는 사실은 의외이면서 불가항력이다. 광부들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 있고 타인의 죽음을 통해 아이들은 아빠의 죽음을 예비한다.
때로 아이들의 눈물은 흐르고 흘러 내를 이루고 마침내 장마마저 부른다.

화자인 나는 지금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갱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광부들의 이야기는 썼다가 이내 지웠다.
미래를 함께 하고픈 그녀에게 이런 소식은 슬프고도 무겁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 함께 장마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로 새로운 답장을 쓴다.

삶은 그렇게 흐르고 시작한다. 가고 보내고 또 오고 맞이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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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보석가게에서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 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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