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2월 31일
김준수 지음 / 밀라드(구 북센)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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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었을 때 나는 두려웠고 세상은 어수선했다. 매스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종말을 언급했고, 컴퓨터의 인식 오류로 비행기 사고가 날 수 있다며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사람들은 징후에 더 겁을 먹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해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개중에는 세를 불려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당시 나는, 아니 우리는 말세 중에서도 말세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몰랐기에 잠시 시간의 유랑자가 되어야만 했던 그 시절, 그 긴박하고 무거웠던 이야기를 작가 김준수가 들려준다.


개인이나 역사의 사실을 개변하지 않으면서 비어있는 시간 속에 허구를 넣어 직조하는 소설을 팩션이라 한다. 김진명의 소설들이나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책들이 이런 갈래다. 그렇기에 팩션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요구된다. 사실과 허구가 씨실과 날실로 정교히 짜여지지 않으면 제한된 시간안의 작은 공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12월 31일』은 김준수 작가가 처음 지은 소설이다. 그간 에세이와 신학 서적을 출간했던 그가 오랜 시간 가슴에 품어온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토하듯 써 내려간 후 내놓은 것이다.


이 소설엔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전직 신문 기자이자 서술자인 현수와 그의 여자 친구이자 고고학자인 희재, 현수의 영적 스승이자 전직 대학 교수인 이필선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오가며 펼쳐진다. 이필선을 만나기 전까지 현수의 삶은 부초처럼 떠돌았다.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감정에 서툴던 현수는 희재를 떠나보내야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이필선과의 만남은 가뭄 끝의 단비 같았다.


이필선은 작은 공동체를 이끌며 종말을 준비하는 집단의 교주다. 대학교 교수였던 아내와 같은 날 정년 퇴직한 후 이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로지 종말의 그날을 고대하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지낸다. 이필선의 행적이 현수의 삶과 이어지면서 서사는 긴박하게 돌아간다.


이필선 부부와 현수는 1년 넘게 함께 지내다 종말의 비밀을 쥔 이스라엘을 찾아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한다. 그러다 현수의 옛 여자 친구이자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의 교환교수로 있는 희재와 재회하게 된다. 이들은 희재의 도움으로 전 지구적 종말의 비밀을 풀어줄 다윗의 열쇠를 찾기 위해 쿰란 동굴에 간다.





이필선은 1999년 12월 31일 예수가 재림하면서 지구와 인류 문명은 끝이 나고 지상에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는 이필선 부부가 강하게 붙잡고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현수는 지지부진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필선을 따라 나선다. 현수는 유토피아가 저 멀리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할 어떤 것이라 깨달으며 이필선과 갈등을 겪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뜨거워진다. 반면 내 마음은 조금씩 서늘해지는데 어떤 질문으로 인함이다. 이필선과 현수의 이야기가 결국은 지구의 종말이 아닌 한 개인의 종말을 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종말론적 관점으로 살고 있느냐는 더 깊은 질문으로 나를 찔러서이다.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를 읽었을 때, 내용엔 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자를 견인하는 튼튼하고 풍부한 서사와 탄탄한 구성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댄 브라운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그 중 『천사와 악마』라는 책은 전율이 일 정도로 캐릭터를 생생히 구현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김준수의 소설도 그랬다. 성경에 단 한번 언급됐다는 다윗의 열쇠를 찾아 행군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 묘사가 빼어났다. 개연성이나 아귀가 맞지 않으면 팩션의 재미는 반감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더 흥미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만 유발하지 않는다. 다윗의 열쇠를 찾는 여정을 통해 사랑과 신뢰, 삶과 죽음, 신앙과 이성, 희생과 헌신 같은 묵중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한다.


삶에서 어떤 시간은 짧고 어떤 시간은 길다. 모든 시간의 의미가 같을 수 없어서이다. 이 소설은 2천 년보다 길었던 1999년 12월 31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당신도 그 여행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내가 이미 함께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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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사랑이다
황해남 지음 / 늘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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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이란 언제나 낯설다. 지근거리에서 한 인생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목사라할지라도 죽음은 마음을 흔든다. 삶의 성찰이라는 진지한 물음을 선사함에도 죽음은 편치 않고 서걱대며 여전히 유예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그런 죽음이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때의 당혹스러움은 어쩌면 목사이기에 더할 수 있다. 병상에 누워 힘겨운 싸움을 하는 교우를 위로하고 격려하던 사람에서, 하루아침에 위로 받으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으로 자리바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곤혹스러움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해 왔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진 것 같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질 때이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만큼은 지켜주실 거라 믿었던 마음이 흔들리는 때, 그런 순간이 아닐까 싶다.

2020년 12월의 어느 날, 저자 황해남 목사는 한 해가 가기 전 건강 검진이나 받아 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검진에서 위암 4기를 선고 받는다. 담당의는 잔여 수명이 불과 6개월이라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투병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암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몸의 상태에 따라 감정이 위 아래를 오갔다. 때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죄스럽게 말하는 자신에게 '사랑한다면 죽지 말고 살라'는 아내의 말이 화인처럼 가슴에 남았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그에게 암은 제동을 걸었다. 매사에 거침 없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이뤄내고야 마는 그에게 암은 일상의 단절과 함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했다.

두 아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목회를 우선했던 것이 떠올랐고, 아내의 소중함은 날이 갈수록 사무쳤으며,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됐다.

자신이 내린 커피를 자신을 쏟아부은 카페이자 교회인 그리심에서 한 모금이라도 마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숨 쉴 수 있는 건강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그는 온 몸으로 배우게 된다.

마음이 가난할 때 인간은 빛난다. 자랑거리가 부질없는 것임을 자각하며 자신의 민낯을 직면하게 될 때 그렇다. 회한으로 가슴은 찢기지만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지는 역설 속에서 황해남은 더 깊이 자신을 만나고 은혜 안에 잠긴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고 주치의는 예상했지만 그는 현재 1년 3개월을 더 살고 있다. 자신이 무력하고 무능한 자임을 자인하면서 하나님께 더 깊숙히 안기고 새로워지며 풍요 속에 거하고 있다.

그에게 이제 암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니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임을 체감하면서 그는 누린 은혜를 지체들과 나누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오래 함께 하기를 바라지만 설사 그렇지 못한다할지라도 그 또한 은혜임을 안다. 그래서 황해남은 오늘도 사랑이라는 떨림을 안고 하루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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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날마다 새벽일기 - 걷고 느끼고 쓰다!
김일곤 / 페스트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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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아닌 살아내야 하는 날이 있다.

매 순간이 힘에 겨워 간신히 하루를 버티는 날 말이다.

숨쉬는 것조차 고역이라 느껴져 자신마저 돌볼 수 없는 그런, 그런 날 말이다.

그와 같은 날들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평안을 찾은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 김일곤이 그러하다.

김일곤은 목회자로 일찌감치 결혼해 아내와 35 년을 함께 했다.

그에게 아내는 동역자이자 좋은 친구였다.

이런 아내에게 4년 전 악성 뇌종양이 찾아 왔다.

뇌종양은 뇌출혈로 이어졌고 편마비를 불렀다.

그는 목회를 친구 목사에게 맡기다시피하고 2 년여 동안 아내 곁을 지켰다.

아내는 손재간이 뛰어났다.

무언가를 만들어 선물하길 좋아했고 자그마한 가게를 열길 원했다.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려 계약까지 마쳤는데 그 무렵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이제 오순도순 살아 보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그와 두 딸은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병은 악화되었고 더이상의 치료가 의미를 잃게 되자 그는 추억 여행을 위해 가족을 차에 태우고 자연을 찾았다.

그러던 작년 4월 부활 주일에 아내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날마다 새벽일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살기 위해 쓴 그의 생존 분투기이자 고백록이며 수상록이다.

마음으로 읽고 가슴으로 공명해야 하는 책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투병 중 아픔을 호소하던 당신 생각날 땐

난 숨이 멎는 것 같습니다.

내 곁을 떠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눈물 흘립니다.

연약한 몸 이끌고

살고자 걷고자 하루하루 애쓰며 힘겹게 생활하던

당신의 뒷모습 비추일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살도록 걷도록 도와주지 못한 나의 무능함에 고개를 떨굽니다.

내 옆에 당신 부재한 현실에 눈뜰 땐

홀로 남은 외로움 그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사별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알지요.

하늘은 내게

남은 자는 떠난 자의 몫까지 다하고

쓰라린 상처 안고 사랑의 통로되라 토닥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 있는 날 동안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53 쪽)

목회자로 살며 다른 이들을 돌보느라 아내는 늘 뒷전이었다.

사무치는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한동안 그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두 딸도 아빠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김일곤은 자신의 심정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 글 모음이 바로 이 책이다.

그의 마음은 짙은 시와 아픈 글로, 때론 생명의 경외를 속삭이거나 외치는 찬연한 삶의 찬가로 빚어져

공감을 부르는 노래와 사진에 담겨 읽은 이의 마음을 두드렸다.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걷기라 했던가.

아내가 떠난 후 그는 두 발로 곳곳을 다니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더 깊이 하나님 곁으로 다가갔다.

숲 사이를 소요하며 사유하고 그 속에서 새롭게 만난 생명과 소중한 이웃들로 인해 큰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강도 되찾았다.

걷기와 쓰기는 그에게 치유와 해방을 안겨주었다.

자신에게 깊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보듬게 되었으며, 다른 이를 더 세심히 배려하게 되었다.

버릴수록 채워지는 경이를 한층 실감하게 되었고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선명히 보게 되었다.

아내의 부재는 여전히 슬프고 또한 자신이 원했던 생의 그림도 아니었지만,

절대자이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기에 그는 이제 벅차도록 빛나는 생명의 아름다움마저 누리고 있다.

천 근도 더 되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혼자였다 둘이 되었고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힘이 되었던

소중한 두 딸과 사위, 사랑스런 손자가 있다.

더하여 친구라는 이름의 새로운 연대와 인생의 3막을 열 뚜렷한 소망도 생겼다.

그 길을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잘 걸어가길 바란다.

내겐 이 책이 마치 인생 3막을 여는 시작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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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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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일본 소설을 읽는다. 읽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따스하고 애잔한 글 속에 머물다 나오면 잠시 가만히 있게 된다. 그 잔상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느껴지는 내 안의 충만함, 어쩌면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찾아 읽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잔잔히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발이 고운 채에 거른 것 같은 그런 담백한 정서를 좋아한다. 그런데 일본 소설의 저 밑에서 뜨거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리지만 활화산 같이 뜨거운 삶에의 열망이 가득 히 느껴진다.

너무 뜨거워 차갑게 가라앉혀야만 되는 열망, 그런 열망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걸어가는 그들 특유의 생에의 여로를 좋아한다. 묵묵히 가기 위해 오로지 그 자신에 의해 식혀져야할 열정과 초월적이라 여겨질 만큼 담담한 생을 향한 순응적 인생관이 우리와는 달라새롭게 다가온다. 땅이 다르고 물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에 나오는 정서일테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의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모리 에토는 아동ㆍ청소년물로 시작해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후 성인물로 방향을 튼다. 2006년 모리 에토는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세 번째 작품인 이 단편집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다.

책 속엔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를 포함해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6편의 단편엔 하나같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겠으며 노정의 고단함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만 그녀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렇기에 고달픔은 처량함이 되지 않고 생의 질곡 또한 삶의 여정의 동반자로 치환된다.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의 역량을 뚜렷히 보여준다. 유엔 난민사업에 종사하는 리카는 NGO에서 활동하던 전남편 에드가 다른 사람을 구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끝내 파경에 이르고 말았지만 리카는 에드를 사랑했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에드.

"비닐 시트가 바람에 휘날린다. 사나운 한 줄기 바람에 펄럭이고 뒤집히고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우주를 춤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처럼 무수하게, 아우성치고 있다. 날씨는 절망적이고 바람은 폭력적으로 몰아친다. 바람이 불면 휘날리는 비닐 시트. 한없이 날려간다. 돌이킬 수 없는 저편으로 내몰리기 전에, 허공에서 그 몸이 찢겨지기 전에, 누군가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한다. " 327 쪽

리카는 에드를 알기에 그의 죽음을 개인적인 슬픔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에드. 그는 죽어 굳어버린 몸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다. 이제 리카는 그의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껴안은 후 더 커진 사랑으로 현장을 향해 나아간다. 누군지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자신을 던진 한 남자의 생을 미완이나 비극으로 그리지 않은 작가의 시선이 경이롭다.

"나는 온갖 나라의 난민 캠프에서 비닐 시트처럼 가볍게 날려가는 사람들을 봐왔어. 생명도, 인간의 존엄성도, 사소한 행복도 비닐 시트처럼 아주 쉽게 날아올라 구깃구깃 구겨져서는 그대로 날려가는 거야. 폭력적인 바람이 불었을 때 가장 먼저 날려가는 것은 약자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야. 노인이나 여자, 아이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들.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들을 도와줘야 해. 그 손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지경이야. " 387쪽

모리 에토는 살았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실로 규정하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의미마저 새롭게 해석한다. 모리 에토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죽음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평생을 다해도 못할 일을 단회의 죽음으로 완성할지도 모른다고. 누구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참 위대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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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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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화려하고 섬찟하며 도발적이고 무겁다. 읽다 보면 어느새 손바닥은 축축해지고 몸은 떨리고 다음 장을 읽는 게 두렵다. 나도 안다. 그깟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덮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서 은근히 미화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다. 하지만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시스트가 꽤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 만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며 조종술에도 뛰어나 극단을 오가며 곁에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 정신까지 탈취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단지 철저하게 이용하고 지배할 뿐이다. 그래서 악에 경도될 확률이 높다.

 

『완전한 행복』은 그런 나르시시스트로 인해 빚어진 사건을 정유정만의 해법과 도식으로 펼쳐 보인다. 정유정은 몇 년 전 한 섬에서 일어났던 섬찟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와 압도적인 서사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구성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이 소설은 유나라는 나르시시스트를 가운데 두고 유치원생인 딸 지유와 현 남편인 은호, 언니인 재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각기 다른 시선 속에 점층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며 모습을 확장해간다. 유나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 사람들을 구겨 넣고는 숨도 못 쉴 만큼 구속하며 조종한다. 때로는 당근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유나는 어릴 적 엄마의 와병으로 할머니의 손에 잠시 맡겨지면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자신이 누려야할 행복을 언니 재인이 뺏어갔다는 생각을 하며 미움을 키웠다. 재인에 대한 미움은 커서도 결코 풀지 않는데 재인의 오랜 남사친이자 마음 속의 연인을 가로채 결혼해서 앙갚음을 한다. 유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매력에 세뇌되어 꼼짝 못하는 남자들을 보았고, 매력의 위력을 누누이 실감하는데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욕망은 이제 그녀보다 크다. 그녀가 욕망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그녀를 휘두르고 있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있을 수 없는 것을 바랐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은 이제 당연하다. 뺄셈으로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하겠다니. 완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니. 행복하겠다며 불행을 선포하는 인간의 미련함이 불꽃보다 뜨겁다. 그녀가 불꽃이 되어 피어날 때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생존의 욕구만큼 강한 게 있을까? 그녀의 사랑에 탐닉했던 남자들은 살기 위해 분투했고, 죽음의 포승줄을 끊으려 몸부림쳤다. 한번 빨대가 꽂히면 몸 안의 수분을 다 빼앗기고서야 벗어날 수 있는 게임에 걸려든 것이다. 유나는 죽음을 부르는 여자였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도 반짝였다. 거미줄에 걸린 애벌레의 운명은 무거웠다. 그렇게 가는 거미줄의 탄성이 그토록 강할 줄이야. 엄혹하며 서슬퍼런 냉기를 가지고서도 유나는 곁에 있는 이들을 불사를 수 있었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심장이 급하게 뛴다. 살갗이 서늘해지고 으스스하다.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아 급히 일어나 걸칠 옷을 가져온다. 소리 없이 유나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쿵쾅거리며 혈안이 되어 찾는 듯한 느낌에 책을 덮는다.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십여 년 전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을 읽었을 때도 이랬다. 고작 책일 뿐인데, 글 몇 자를 이기지 못해 떨고 있다니.

 

사람다울 때 인간은 찬연히 빛난다. 지유와 함께 할 때만 유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서늘하고 매정하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지유만큼은 챙겼다. 그러나 지유에게 유나는 좋지만 무서운 사람이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며 아빠로부터 자신을 갈라놓은 사람이기도 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지유는 엄마를 겪으며 알았다. 잘못하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일체의 변명이나 떼쓰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지유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 시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빙빙 돌고 있다. 유나가 과연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인가에 관해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다. 그녀는 싸이코패스에 나르시시스트이고 나는 정상적인 사람인가. 내 안에 그런 악은 없는가. 고백하자면 나도 내 안의 악을 본 적이 있다. 희한하게도 아기를 낳고 나니 내 안의 이기심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면 아래 가려져 있던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던 내 안의 어두움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두려운 경험이었다.

 

화사하고 빛났지만 유나는 언제나 죽음을 불러왔다. 그토록 애썼지만 유나의 남자들은 아무도 살아서 유나를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남편조차도. 지유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너무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을 장난감처럼 주무르며 즐기더니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파편을 맞고 유나 또한 그렇게 삶을 마감한다. 타인은 자신에게 당해도 마땅하고 자신은 불행과 무관하다는 오만이 결국 자신을 파괴로 밀어넣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악이 추동한 결과다.
 

정유정은 말한다. 우리는 소중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존재라고. 특별한 나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줍짢은 생각이 결국 자신을 삼켜버리는 결과를 보는 것은 비극이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 그래서 그에 준하는 대접과 상황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유아기적 생각이 불러온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정유정은 선명하게 그려낸다. 그 서늘하고 푸른 불꽃 같은 책을 작년에 여름에 읽었다. 그리곤 이제서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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