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부터 탄탄하게, 처음 듣는 의대 강의 - 의대 지망생과 일반인을 위한 의학 수업
안승철 지음 / 궁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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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혹은 가보고 싶지만 가기 힘든 길에 대한 호기심이 누구나 있다. 그런 호기심은 때로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는데, 내게는 의학 혹은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다. 오래 전 방송국에서 건강 프로그램의 구성작가를 했었다. 프로그램의 성격이 그렇다보니 의사 선생님들을 모시고 했는데, 많은 환자로 쉴 시간이 없는 그분들에겐 방송 출연이 휴식 같은 시간이었던 듯하다. 들뜬 듯 기뻐했던 모습들을 기억한다. 연사는 면면이 달랐는데 유쾌하고 깔끔하게 프로그램을 이끄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본인의 성격대로 서글서글하고 씩씩하게 방송을 이끈 선생님도 있었고, 첫 출연이라 진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 보는 사람마저 긴장하게 만든 선생님도 있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임에도 연을 대어 나오게 된 선생님 중 한 분은, 이렇게  해서라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토로하기도 했다. 방송 출연을 안 하다 보니 환자들이 '우리 선생님은 실력이 없나' 하는 의심을 한다며, 때로 전문가도 아닌 사람을 명의로 만들고 방송 출연을 안 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런 현실에 대해 난감한 심정을 피력했다. 당시 이 선생님은 유명 대학 병원의 부원장이었다.


사설이 길었다. 다시 돌아가자. 그래서 의사가 저자인 책은 기회가 닿으면 읽는 편이고, 이 책도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의사가 쓴 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둔 부모라면 못 보내서 문제지, 된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들여보내고 싶은 곳이 의대일 거다. 비록 서울의 끝에 가깝지만 내가 사는 곳도 교육특구라 불리는 곳 중 한 곳인데, 몇 년 전 근처의 어떤 학교가 서울대 의대에 10년 만에 학생을 들여보냈다며 플래카드를 걸고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아이가 어려 별 관심 없이 듣고 말았지만, 해당 범주 안에 있는 부모들에겐 무척 희망을 주는 소식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상위 1%의 학생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의대에서는 강의를 어떻게 하며 어떤 걸 가르치는 걸까? 인터넷을 뒤지면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겠지만 현직 의대 교수가 알려주는 것만큼 정확하고 믿을만한 책이 있을까 싶다. 의대를 꿈꾸는 학생이나 궁금해 하는 일반인, 자녀로 인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학부모들에게 이 책은 명쾌히 궁금증을 해결해 줄만하다. 저자 안승철은 단국대 의대 교수로, 몇 년 전부터 대학의 교양강좌를 통해 일반 학생들에게도 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난이도를 낮춰 쉽게 가르쳐도 어렵다는 말을 들었단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쉬우면 그게 의학인가? 그러나 배우는 사람의 입장은 그렇지 않으니 이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하던 결과물이 시간이 흘러 이 책 『처음 듣는 의대 강의』를 낳게 되었다.


저자의 글은 쉽고 친절하며 유려하다. 믿고 잘 따라가면 된다. 단지 내용이 조금 어려울 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데, 독자가 학생이라면 별 걱정 안 해도 된다. 군인이 돌이라도 씹어먹듯 학생은 그 어떤 내용도 읽을 수 있고, 분위기만 잘 잡아주면 신이 나서 읽을 수도 있다. 학생의 정신력은 위대하니까.


"호흡계를 구성하는 기관 중 인두나 후두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테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한 번씩은 들어본 이름입니다.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의 인(咽)과 후(喉)가 바로 인두와 후두를 가리키거든요. 이(耳)와 비(鼻)는 귀와 코를 가리키는 말인 것은 아시죠? 인두는 코와 입의 내부 공간이 합쳐지는 곳에서 식도가 시작하는 곳까지의 공간을 말합니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들여다보는 곳이 바로 인두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인두의 림프절들이 부어오르거든요. 후두는 인두와 기관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이 공간으로 음식물과 공기가 같이 지나가죠. 


코와 입의 공간을 아래쪽으로 연장시켜보면 코가 입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니 당연히 기관이 식도의 뒤쪽으로 지나가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식도가 기관의 뒤쪽에 놓여 있습니다. 잘못하면 음식물이 기관으로 들어가기 딱 좋게 생겼지요. 다행히도 우리 몸에는 음식물이 기관으로 넘어가는 걸 방지할 수 있는 장치(후두 덮개)가 있습니다. 음식물이 기관으로 잘못 들어가면 사래가 들리죠. 후두 덮개가 제 기능을 못해 음식물이 기관지로 들어가면 폐렴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p.113~114


이 책은 생리학적 시각에서 인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대해 주로 다룬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사진과 그래프, 그림들이 있으며 소설 읽듯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관심사부터 읽어도 되고, 모르면 넘겼다가 다시 읽으면 된다. 참,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선정하는 '2019년도 세종 도서 교양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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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스토리콜렉터 73
헤더 모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북로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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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처는 살아온 시간의 무늬'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로 지나온 시간을 그릴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축복일 것이다. 순식간에 공포가 찾아오고, 누군가 죽어야만 되는 시간 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상처는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라 명명했고, 그 시간을 뚫고나온 사람들을 생존자라 불렀다.


미국의 역사 저술가 조셉 커민스는 그의 책 『잔혹한 세계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벽돌이나 콘크리트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피와 살, 뼈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말이 아우슈비츠만큼 부합되는 곳이 어디 있을까? 6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극도의 공포 속에 수용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이야기를 뉴질랜드의 작가 헤더 모리스가 소설로 펴냈다.


헤더 모리스는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유대인들의 팔에 수형 번호 새기는 일을 했다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유대인 랄레 소콜로프를 만나 지난 시간을 듣는다. 그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 바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불안이 전신을 휘어감는 그곳에서 랄레는 반드시 살아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겁을 먹고 떨고 있는 한 소녀, 기타와 함께 하면서부터다. 이제 랄레는 두 사람 몫의 희망을 붙잡고 자신을 다잡는다.


수용소에 오기 전 랄레는 수려한 외모와 재치로 잘 나가던 24세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세상에서 유대인은 있으면 안되는 존재였고, 마땅히 격리되거나 어딘가로 수송되어야 하는 족속이었다. 그토록 죽음이 근접한 곳에서 목숨을 지키는 것은 신의 가호와 담력이 손을 잡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3년을 넘어설 줄은 누구도 몰랐고, 기타가 다른 곳으로 끌려갈 때까지 랄레는 그녀의 이름조차 정확히 몰랐다. 생존의 법칙은 그토록 무서웠다.


그런 시간들을 감싼 이야기이자 기록이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이다. 단 몇 초도 허비할 수 없을만큼 급박한 상황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인간의 삶을 향한 염원과 사랑은 더 뜨겁게 발화한다. 생이 구차할수록 간절한 바람은 목숨을 담보하고 삶의 유일한 끈이 된다. 그 이야기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만났다. 해가 바뀌면 하게 되는 기대와 기대가 주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여기저기서 많은 일들이 난무하고 있는 이런 시점에서. 책의 뒷 표지에는 '아우슈비츠의 문신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라고 책 소개를 마무리 한다.


그런데 내게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아우슈비츠'에 자꾸 방점이 찍힌다. '아우슈비츠'로 쓰고 있지만 자꾸 '경고'로 보인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하나 안다면 아우슈비츠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정도다. 굳이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을 끌어오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때론 내 안에, 때론 당신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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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 진심이 열리는 열두 번의 만남
이진순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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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부터 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빨리 쓰고 싶은데, 막상 쓰려면 이상하게 쓰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민의 만약은 없다가 그랬고, 사회학자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그랬다. 그 뿐인가. 그토록 좋아하는 신형철의 책은 시도조차 못했다. 한데 이진순의 이 책은 또 왜 이런가. 지난 봄부터 초여름까지 두 번이나 읽어놓고선, 다시 보니 줄까지 쳐가며 읽어놓고선 못쓰고 말았다.  

 

그녀의 인터뷰집이 유명인들의 이야기거나, 로또 맞은 사람처럼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궁금해 죽겠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진작 썼을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데 뭔 부담이 있겠나. 한데 이제와 보니 서문도 그랬고, 다는 아니지만 인터뷰이의 삶이 여간 고되고 녹록치 않았다. 보통의 날을 사는 것조차도 경주를 요구하는데, 더 힘든 곳으로 눈을 돌려야 마음만 아프지 않을까 하는 자기보호막이 발동해서는 아닌가 싶다. 솔직하자면 이기심의 발로지 뭔가 

 

누구나 그렇듯, 내가 인터뷰한 분들도 유약하고 비루하고 소심한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이 독자에게 공명과 감동을 줬다면, 그건 그들이 불퇴전의 용기와 무오류의 인생역정을 보여주는 위인이어서가 아니라 좌절의 상흔과 일상의 너절함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낙관과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12명의 사람들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외상외과 의사 이국종도 있고, 영화감독 임순례도 있으며, 고위공직자였다 해직된 노태강도 있고, 글 못지않은 입담으로 유명한 황석영도 있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그 외의 8인이다. 이들의 이름 석자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도 없고,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불러키기도 힘들지만 이들의 삶은 여전히 뜨겁다 

 

왜 가는 걸 안 말렸느냐고요? 우리도 애 셋 키우는 부모니까요. 처음에 제가 남편을 말렸던 것도 애가 셋이니 위험한 일 하지 말라는 거였는데, 안타까운 부모 마음은 우리나 세월호 유가족이나 똑같은 거더라구요. 처음에 애들 때문에 말리다가 결국 애들 때문에 가라고 했어요.” 

 

이진순은 세월호의 민간잠수사 김관홍의 부인 김혜연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당시 김관홍이 세상을 뜬지 막 3개월이 지난 시점의 인터뷰인데 김혜연은 의외로 담담하다. 의인 김관홍이 아닌 인간 김관홍으로 남편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부재가 아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단다

 

‘여전히사이에서 세월호는 아직 부유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빠 없는 아이들 셋은 남겨져 살고 있다. 이진순은 삼십대의 부인이 살아야할 남은 세월에 목이 메여 어떤 입발림의 말도 못하고 작은 바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앞으론………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의 가난한 노인들은 자기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보다는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시선과 평가를 쫓아서 그걸 자기정체성으로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모방해서 자기를 평가하고 그 잣대로 세상을 보죠. 

 

아이 둘을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살다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마흔일곱에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고 이혼했다는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의 이야기다. 최현숙은 가난하고 소외된 노인들의 가슴 속 깊은 응어리와 구겨진 기억들을 끄집어내 쓸모없는 삶이었다고 여기는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자칭 나쁜 여자라는 최현숙이 쓴 할배의 탄생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노인들의 개인사를 역사의 한 영역으로 이입하는데 자그마한 자리를 냈다 

 

이외에도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며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생각 많은 둘째언니 장혜영, 핑크 소파를 박차고 나온 우아한 미친년 이라는 별칭의 화가 윤석남, 원시적 감각의 힘을 믿는다는 작가겸 래퍼 손아람과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소설가 황석영, 그리고 아픈 이야기를 아프게 들어준다는 구수정과 거리의 철학자이자 교육가인 채현국의 이야기 등이 있다.

 

이들 속에, 이들과 함께 또 다른 이진순이 있다. 그녀 또한 보이지 않는 섬세함으로 사람에 몰입하며 세밀하게 사회를 다듬는 중이다. ‘세상을 밝히는 건, 잠깐씩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짧고 단속적인 반짝임이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이진순. 그녀 또한 오늘도 여전히 반짝인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작고 아름다운 별인지 모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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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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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돌이켜보니 오랜 시간 책에게 굽신거렸다. 바리바리 돈까지 갖다 바치며 아양을 떨었다. 그깟 책 한 권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름 전작주의자요, 북콜렉터요, 좋은 책을 보는 안목을 가졌다 자칭하며 경건하게 명품 대하듯 그래왔다. 비록 읽지는 않아도 꾸준히 구매해 왔으며, 고이 모셔둔 책은 또 얼마인가. 그렇게 일방적 애증의 관계로 책과 긴 세월을 이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역시 책은 휘뚜루마뚜루 읽어줘야 제 맛이고, 여기저기 막굴려 읽히게 해야 책의 소명을 다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야 장서가인지, 애서가인지의 반열에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쯤 이 책을 만났다. 은근 열 받게 저자는 글을 꽤 잘 썼다. 전문 글쟁이에게 열등감이 있다 내비치고는 한치의 양보도 안하며 글에 대해 언급했다.

 

"죽은 글을 쓰려면 먼저 당신의 생생한 생각을 직접 쓰는 천박함을 피해야 한다. 세상에는 특정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인용들이 있다. 한동안 가장 핫했던 아이템으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있다. 누가 당신 차를 긁어놓고 도망간 얘기를 쓸 때조차 '중산층의 씁쓸한 뒷모습,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한 얼굴이다'라고 써야 있어 보인다. 죽은 글을 쓰고 싶은 그대, 우선 관습적 인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같은 일도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 문제를 얘기하려면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패놉티곤'(조지 오웰의 『1984』는 유행이 지났으니 사용에 주의할 것)등등 많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갱년기적 고민에 관한 얘기는 보통 하이데거가 무슨 피투성이였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다. 헤겔의 '인정투쟁'도 여기저기 써먹기 좋다. 관습적 인용의 생활화 자체가 인정투쟁이다." <내 취향이 아닌 글들> 중에서

 

남들은 인정 안하겠지만 폼나는 말로 지식 쪼가리나마 있어 보이고 싶어 애쓰는 사람이 나다. 짧은 분량의 글이나마 올리려면 쓴 글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읽고 또 읽는다. 나중엔 너무 읽은 뒤끝에 머리가 아파 걍 올려버리는 우를 범하니까. 그런 내게 문유석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봐요, 당신 스타일로 써! 인생 짧은데 뭐 남을 신경써!"

 

대체로 그의 글은 거침없고 재미있으며 편안하다. 작가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 듣긴 했지만 아주 많이 읽은 축에 속해 보였다. 이런 평도 어떤 데이터없이 내 기준으로 한 평이니까 진짜 많이 읽은 사람에 비하면 또 어떨진 모르겠지만 많이 읽은 건 분명한 듯했다. 어릴 때부터 주야장창 읽었다고 했고, 읽은 도서 목록이 대단했다. 저자에게 책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친구 중의 친구이지 않나 싶었다. 사실 책만큼 변함없는 친구가 어디 있으랴.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등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간접 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중에서

 

어디선가 '책을 읽는다는 건 삶을 읽는 것'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문유석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읽은 책들을 소개했지만 나는 책을 통해 문유석을 읽었다. 문유석이란 사람의 생각을 접했고, 책으로 지어진 한 사람의 생을 만났다. 그리곤 내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좋은 책을 사고 싶어 호들갑을 떨었고, 읽고 싶어 안달했고, 읽히지 않아 속상해했던 시간들이 결국 내 인생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통해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니. 이 정도면 내 인생도 성공한 인생이다. 이토록 긍정적으로 말하다니, 이 또한  책이 내게 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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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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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겨울, 한 지인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해 달라' 하셨다. 책을 고르려다 보니, 이 분이 이미 오래 전 책을 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웬 어불성설인가. 책을 낸 적도 없는 사람이 책을 낸 작가에게 글쓰기 관련 책자를 소개해 준다니. 즉시 연락을 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그러자 '진지하게 부탁하는 거'라며 책을 소개해 달라신다. 급하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 또한 진지하고 급하게, 게다가 평까지 꼼꼼이 읽은 다음 책을 골랐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얼마 되지 않아 전부 주문했다며 '고맙다'는 인사가 왔다. 읽지도 않은 책을 소개해 드렸으니 켕긴다고 할까, 뭔가 거북했다. 그리고는 잊고 지내다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말이 들리길래 궁금하기도 하고 글 쓸 때 도움이 될까 싶어 구입했다. 요즘 그림같이 편집 잘 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책 표지나 안이나 하나같이 덤덤하고 재미없게 편집돼 있었다. 하지만 음식이 맛 있으면 식당 허름한 게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이 책이 그랬다(위에 보여지는 책은 예스24 리커버본). 약간의 냉소와 그보다 좀 더 많은 유머를 버물여 글 쓸 때 알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이 구체적인 예와 함께 쉽게 설명돼 있었다.

 

 

저자 김정선은 20년 넘게 교정 교열 일을 하며 남의 문장을 다듬어 왔다고 했다. 오랜 실무를 통해 배우며 익힌 시간들이 이 책을 내게 된 동기인 듯하다. 김정선, 이러니까 여자같지만 남자다. 김정선은 평소 별 생각 없이 쓰거나 안 써도 상관없는데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부터 소개한다. '-적'을 먼저 드는 걸 보니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예인가 보다.

 

그는 "사회적 현상, 경제적 문제, 정치적 세력, 국제적 관계, 혁명적 사상, 자유주의적 경향"와 같은 표현을 "사회 현상, 경제 문제, 정치 세력, 국제 관계, 혁명 사상, 자유주의 경향"으로 바꾸어준다. 이렇게 쓰면 훨씬 깔끔하고 더 분명해 보인단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 조사 '-의'의 남발도 있다. "문제의 해결, 음악 취향의 형성 시기, 노조 지도부와의 협력, 문제 해결은 그다음의 일이다, 부모와의 화해가 우선이다, 이제는 모든 걸 혼자의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를 "문제 해결, 음악 취향이 형성되는 시기, 노조 지도부와 협력하는 일, 문제 해결은 그다음 일이다, 부모와 화해하는 일이 우선이다, 이제는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로 다듬어준다.

 

 

'들'은 의존 명사로도 쓰이고 접미사로도 쓰인다. 의존명사로 쓰일 때는 '등'에 해당되는데 우리말 문장에서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 '-들'은 조금만 써도 문장을 어색하게 만든단다. "사과나무들에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모든 아이들이 손에 꽃들을 들고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뛰어갔다, 수많은 무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해 갔다"와 같은 경우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모든 아이가 손에 꽃을 들고 자신의 부모를 향해 뛰어갔다, 수많은 무리가 열을 지어 행진해 갔다'로 고쳐준다.

 

 

덧붙여 관형사 '모든'으로 수식되는 명사에는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 '-들'을 붙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무리'나 '떼'처럼 복수를 나타내는 명사에 뭐하러 '-들'을 붙이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어질러졌던 집이 정리된 느낌이다. 이밖에도 많이 있지만 글 쓸 때 늘 나를 불편하게 하던 '과거형을 써야 하는지 안 써도 되는지'에 대한 예가 있어 살펴본다. "배웠던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복습이다, 자책에 빠져 지냈던 몇 해 동안 그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어린 시절 외국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내겐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를  "배운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복습이다, 자책에 빠져 지낸 몇 해 동안 그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어린 시절 외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내겐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로 매만져준다.

 

 

우리말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뿐이어서 한 문장에 과거형을 여러 번 쓰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문장도 난삽해 보인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좁은 교실에서 난로를 피워가며 공부를 했어야 했다'와 같은 문장은 '내가 어렸을 때는 좁은 교실에서 난로를 피워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복수 표준어가 있는 것을 알기 전 헷갈리는 낱말을 쓸 때마다 맞춤법 검사기에 넣고 일일이 확인하곤 했다. 진작 알았다면 틀릴까봐 염려하는 일 없이 안심하고 썼을텐데 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만 알아도 글이 더 정돈되고 뜻이 명확해질 거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문법에 대한 기본 지식도 더하여질 것 같다. 우리가 졸업한 지가 어언 몇 년인가 말이다. 요즘 나는 '옛날에' 하면 기본 30년이다. 김정선은 이 책을 내기 전 『동사의 맛』이란 책도 썼단다.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 부제가 이렇다.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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