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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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돌이켜보니 오랜 시간 책에게 굽신거렸다. 바리바리 돈까지 갖다 바치며 아양을 떨었다. 그깟 책 한 권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름 전작주의자요, 북콜렉터요, 좋은 책을 보는 안목을 가졌다 자칭하며 경건하게 명품 대하듯 그래왔다. 비록 읽지는 않아도 꾸준히 구매해 왔으며, 고이 모셔둔 책은 또 얼마인가. 그렇게 일방적 애증의 관계로 책과 긴 세월을 이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역시 책은 휘뚜루마뚜루 읽어줘야 제 맛이고, 여기저기 막굴려 읽히게 해야 책의 소명을 다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야 장서가인지, 애서가인지의 반열에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쯤 이 책을 만났다. 은근 열 받게 저자는 글을 꽤 잘 썼다. 전문 글쟁이에게 열등감이 있다 내비치고는 한치의 양보도 안하며 글에 대해 언급했다.

 

"죽은 글을 쓰려면 먼저 당신의 생생한 생각을 직접 쓰는 천박함을 피해야 한다. 세상에는 특정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인용들이 있다. 한동안 가장 핫했던 아이템으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있다. 누가 당신 차를 긁어놓고 도망간 얘기를 쓸 때조차 '중산층의 씁쓸한 뒷모습,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한 얼굴이다'라고 써야 있어 보인다. 죽은 글을 쓰고 싶은 그대, 우선 관습적 인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같은 일도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 문제를 얘기하려면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패놉티곤'(조지 오웰의 『1984』는 유행이 지났으니 사용에 주의할 것)등등 많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갱년기적 고민에 관한 얘기는 보통 하이데거가 무슨 피투성이였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다. 헤겔의 '인정투쟁'도 여기저기 써먹기 좋다. 관습적 인용의 생활화 자체가 인정투쟁이다." <내 취향이 아닌 글들> 중에서

 

남들은 인정 안하겠지만 폼나는 말로 지식 쪼가리나마 있어 보이고 싶어 애쓰는 사람이 나다. 짧은 분량의 글이나마 올리려면 쓴 글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읽고 또 읽는다. 나중엔 너무 읽은 뒤끝에 머리가 아파 걍 올려버리는 우를 범하니까. 그런 내게 문유석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봐요, 당신 스타일로 써! 인생 짧은데 뭐 남을 신경써!"

 

대체로 그의 글은 거침없고 재미있으며 편안하다. 작가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 듣긴 했지만 아주 많이 읽은 축에 속해 보였다. 이런 평도 어떤 데이터없이 내 기준으로 한 평이니까 진짜 많이 읽은 사람에 비하면 또 어떨진 모르겠지만 많이 읽은 건 분명한 듯했다. 어릴 때부터 주야장창 읽었다고 했고, 읽은 도서 목록이 대단했다. 저자에게 책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친구 중의 친구이지 않나 싶었다. 사실 책만큼 변함없는 친구가 어디 있으랴.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등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간접 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중에서

 

어디선가 '책을 읽는다는 건 삶을 읽는 것'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문유석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읽은 책들을 소개했지만 나는 책을 통해 문유석을 읽었다. 문유석이란 사람의 생각을 접했고, 책으로 지어진 한 사람의 생을 만났다. 그리곤 내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좋은 책을 사고 싶어 호들갑을 떨었고, 읽고 싶어 안달했고, 읽히지 않아 속상해했던 시간들이 결국 내 인생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통해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니. 이 정도면 내 인생도 성공한 인생이다. 이토록 긍정적으로 말하다니, 이 또한  책이 내게 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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