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정치학
아브람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S. 허먼 & 데이비드 페터슨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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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투키디데스-

대규모의 학살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자행해 왔던 학살은 부지기수였고, 인간의 역사는 살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성의 입구를 봉쇄해 성 안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거나 불을 질러 아비규환을 만들거나 한 마을 전체를 도륙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살륙의 광분이 휩쓸었던 때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아픔도,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통절감이라도 느껴야 하건만 그런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하고서도 이리 당당한 것은 위장된 명분의 정당성 때문이며 단순한 광기에 의해서라기보단 보이지 않는 손의 전략적 지원이 다각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살륙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배제되거나 증폭되며 대량 살상은 목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진행된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영혼의 불감증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학살의 정치학'은 학살의 현재적 상황과 이를 중심으로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망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전세계의 경찰 국가를 자임하며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를 높이기 위해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노암 촘스키와 에드워드 S.허먼, 데이비드 페터슨은 상세하게 일러준다. 특히 이 책에서 3명의 공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행태에 언론이 직간접적으로 어떻게 관여되어 있으며 어떤 형태의 편향적 기사로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즉, 이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고발임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를 교묘하게 덧칠하여 다른 이미지로 변조하고 방조한 언론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질타이다 .

현지 정세를 알 수 없는 일반인들이 가치 판단를 내릴 수 있는 실제적인 근거는 언론의 보도 자료이다. 그 보도 자료를 믿고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자료에 대한 암묵적 신뢰를 나타내며 이는 언론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편파 왜곡까지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이며 직권 남용이다.

그런 행태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언론사의 대주주가 기득권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이윤에 맞추어 기사는 일정한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으며 세계 정세의 판도에 따라 정치적 편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이익에 맞춰 실리는 기사들은 사람들의 판단을 오도한다. 현재 미국내 미디어는 학살에 관한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사보다는 자국의 정책에 따라 취합하여 선택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이처럼 추악한 미디어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 일러준다.

'학살의 정치학'은 건설적인 학살과 사악한 학살, 몇 가지 자비로운 학살과 가공의 학살, 이렇게 4 부류의 학살로 나뉘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학살을 나누는 기준은 전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따라서 살해된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은 별개의 문제로 치부되고, 중요한 것은 단 몇 천명이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면 기사거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 기사는 과장과 왜곡을 거쳐 신문지면에 올려지게 되며 일거에 주목을 받는다. 학살 현장도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실리지만 살륙의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간 현장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사에 실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설사 실린다 해도 몇 줄로 요약돼 실리며 기사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미디어는 이제 미국의 신실한 대변인이 되어버렸다.

아울러 이 책에서는 국제 역학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조명해 준다. 국제 질서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유엔의 최대 지원국이란 힘을 동원해 유엔의 실질적 주인으로서 전세계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리하여 이제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유엔이 유엔다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미국이 동의를 했을 때 뿐이다.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기사는 기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언론의 힘은 사실적인 보도와 진실의 추구에서 나오는 것이지 화려하게 치장된 거짓글로부터 기인할 수는 없다. 그런 사실을 언론인들이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언론은 변질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별개의 종이 되어버렸다.

타국의 한낱으로 치부되는 이름없는 죽은 자를 향한 관심이 사라질 때 언론은 이미 중환자와 다름없게 된다. 만약 언론이 더 나아가 그들을 마치 없었던 사람인양 치부할 때 언론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은 미로가 될지 모른다. 펜의 힘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이 얼마나 무섭고도 무거운 말인지 이 책은 내게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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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국어사전
채인선 지음 / 초록아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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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귀 계열인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말에 나도 모르게 세뇌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原 주인이 따로 있다. 좋아하는 동화 작가 중 채인선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 중 한 명이 좋은 동화 작가로 채인선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채인선은 우리나라 3대 동화 작가중 한 명이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슬그머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채인선의 글을 찾아 읽었다.

 

채인선은 주제 의식을 녹여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다. 그녀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읽고 나면 마치 박하사탕을 먹은 듯한 개운함이 있다. 특히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실질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를 이야기 속에서 풀어내기 때문에 그녀의 책을 읽으면 구체적인 지침들을 얻을 수 있다. 채인선이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나 있을 때, 그녀의 글을 당분간 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올 초 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저학년용과 전학년용으로 나누어 초등학생용 사전 두 권을 구입했다. 저학년용으로 구입한 책이 채인선이 펴낸 '나의 첫 국어사전'이다. 요즘 세상에 사전처럼 인기 없는 책도 드문데, 채인선이 왜 사전을 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었으니 남다를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일반인이 생각해도 사전은 공은 많이 들고 표시도 안나는 작업인데 그 작업을 책임지고 했다니 보통 사명감이 아니고서는 시도도 못할 작업일 터다. 작가가 되기 전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다는 그녀니 평소 마음 속에 품었던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쳐보니 어린이들만의 부드럽고 따뜻한 사전을 꿈꾸어 온 출판사와 채인선이 의기투합했음이 서문에 감격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이 사전은 읽기만 해도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단어의 뜻을 설명해도 어렵다 싶을 때는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한 페이지에 2~3개의 그림을 넣어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게 편집돼 있다. 사전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장치로 보인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려면 낱말은 많이 아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사전에 있는 모든 글들이 사전 속에 있는 낱말들로만 쓰여졌다는 채인선의 말에서 그녀의 옹골진 생각과 어린이를 위한 좋은 사전에 대한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책도 읽히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런 점에서 이 사전은 주목할 만하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전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느낌을 없애고 친근하게 여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사전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채인선은 인테넷 사이트의 검색창에 밀려 저 구석에 방치됐을지도 모를 사전의 소중한 의미를 이 책을 통해 되새기게 한다. 나 또한 언어의 보고라 하는 사전이 우리 아이 곁에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한 번 더 펼쳐 볼 예정이다. 그래서 채인선의 수고가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데 한 뼘이라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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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식물이 사람을 살린다 - 웰빙시대의 새집증후군 치료법
손기철 지음 / 중앙생활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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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니지만 나는 화분을 싫어했다. 그래서 베란다에 화분을 쭈욱 두고 식물을 키우는 친정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쁘지도 않은 녀석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여기고는 오며가며 꽤 눈총을 주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 오랜 시간을 물 한 번 줘 본 기억이 없다.

 

8년 전 쯤 일본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올 4월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센다이 근방의 야마가타란 곳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일본은 땅이 비옥하다. 특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아름드리 나무들은 신령한 기운을 느낄 만큼 높이 자라 있다. 그 때 머물렀던 선배네 집에 작은 텃밭이 있었다. 텃밭에는 선배 시어머니가 심어놓은 아기자기한 식물들과 나무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선배 언니가 한 마디 하셨다. '네가 그러고도 글을 썼었니? 땅을 보고도, 생명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너에게서 어떤 글이 나올 수 있겠니? 라며 '너의 냉랭한 정서부터 회복해야 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도 나는 식물을 보고 어떤 감정도 가질 수 없었다. 단지 화원을 갈 계기가 계속 생겼고 화분과 가까이 할 시간들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무척 힘든 일이 생겼다. 그 때 거리를 거닐다 본 조그만 화초에 내 눈이 갔다. 그 후 몇 달을 하루 종일 화초를 심었다 옮겼다하며 지냈다. 내리쬐는 햇볕을 다 받아가며 베란다에서 어린 식물들을 키우며 내 마음은 나도 모를 위로로 채워지고 있었다. 당시 내 손톱 밑은 매일 같이 녀석들과 함께 하느라 까매 있었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자기 좀 봐달라는 듯 쑥쑥 자라는 녀석들에게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겨울이 되었다. 얼어죽을까 싶어 녀석들을 집안에 들였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잎파리는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녀석들만 보면 기분이 좋아 잎파리를 만지고 닦아주며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여놓은 화분이 우리 집을 얼마나 풍성하게 채웠는지 모른다. 그 해 겨울 화분은 생명이 주는 찬란한 기운 뿐 아니라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인테리어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어 내게 많은 기쁨을 선사했다.

 

'실내 식물이 사람을 살린다'는 그런 화분 즉, 실내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 손기철 교수는 대부분의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제한된 우리네 삶에서 실내 공기를 정화하고 새집증후군을 퇴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실내 식물 키우기를 역설한다. 이런 이유외에도 정서적 안정을 취하는데 식물 만한 것이 없음도 강조한다. 그는 "식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가족과도 같은 존재" 라며 "현대인의 몸과 마음의 질병은 녹색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식물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라 소개한다.

 

그는 식물이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 증거 부족으로 인식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특히 집이나 사무실에서 기르면 좋은 기능성 실내식물 15가지를 사진과 함께 소개해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실내 식물이 단순한 공기 정화 뿐 아니라 새집증후군이나 빌딩증후군을 퇴치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며 실내 환경도 조절할 수 있다는 근거도 대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는데 식물이 일조한다는 이야기는 나도 경험한 바다. 겨울철 실내에 화분이 있을 때 확실히 추위가 덜 했고 여름에는 한결 시원했다. 식물 내의 수분이 실내 온도를 일정하게 조절해 주고 녹색이 주는 기운이 집안을 따스하게 채우는 경험은 놀랍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게다가 손기철 교수는 뇌졸중이나 정신분열증, 정신지체나 치매의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결과를 보여주며 원예치료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페이지를 할애한다.

 

특히 그가 실내에 식물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로 내세운 15가지는 되새겨 봄직하다.

 

1. 실내의 공기오염물질(휘발성 유기화합 물질, 오존,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질소산화물, 아황산가스)를 정화한다.

2. 실내 먼지나 공기 중 미생물이 감소된다.

3. 여름철에는 냉방, 겨울철에는 난방 및 가습기 역할을 한다.

4. 전기 제품과 같은 유해 전자파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해 전자파가 감소된다.

5. 음이온을 발생하므로 건강유지에 효과적이다.

6. 식물에 따라서는 휘발성 물질을 방출하므로 심신을 안정시킨다.

7. 식물을 볼 때 알파파가 증가하고 델타파가 감소되므로 정신생리를 향상시킨다.

8. 피로와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며, 원예치료가 된다.

9. 작업 능률을 향상시킨다.

10. 야간의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킬 수 있다.

11. 아늑하고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는 고향과 같은 분위기를 준다.

12. 녹색 건축 재료및 소품 역할을 한다.

13. 심신의 건강을 위한 레저활동으로 최적이다. (녹색의 애완동물)

14. 부작용이 없고 가격 대비 효과가 뛰어나다.

15. 관리비가 들지 않으며, 설치와 해체가 간단하다.

 

손기철 교수가 소개한 기능성 실내 식물 15가지는 아래와 같다.

 

   

                관음죽                                   파키라                               드라세나

 

 

관음죽, 네프롤레피스, 대나무야자, 드라세나, 벤자민 고무나무, 산세베리아, 선인장 및 다육식물, 스파티필름, 싱고니움, 아이비/헤데라, 왜성대추나무야자, 인도고무나무, 파키라, 황야자, 꽃이 있는 분화식물

 

위의 녀석들은 거리 좌판이나 화원에 들어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식물들로 키우기도 쉽고 자라기도 잘한다. 매우 착하고 순한 아이들로 물만 제 때에 주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겨울이니실내에만 들이면 된다.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어느 날 내가 왜 그렇게 식물을 싫어했는지를 생각해 봤다. 불현듯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집에 크디 큰 화분들이 줄줄이 들어온 날은 아버지의 사업이 정리된 날이었다는 것을. 그런 기억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였고, 한 번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제서야 내가 왜 그렇게 문주란을 싫어했는지를 깨닫게 됐다.

 

이제 나는 식물을 키우며 행복을 느낀다. 지금은 전보다 덜 키우지만 식물들이 쑥쑥 자라며 내게 주었던 기쁨은 아이가 주는 기쁨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나는 어린 식물을 키우며 어릴 때의 나를 위로했고,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내 나중도 지금보다 자라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몇 년전 어린 식물들이 주었던 위로는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위로였다. 올 겨울에는 그 위로와 기쁨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넘치도록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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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나막신 우리문고 1
권정생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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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 길이 없어 타국을 향해 보따리를 싸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디아스포라를 감행했던 용기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토피아는 없었다. 단지 최소한의 먹을 것이 그 곳에 있었을 뿐이다. 살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했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들의 삶은 그 곳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이어가게 된다. 남의 땅에서 그들의 언어를 쓰는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슬픈 나막신'은 디아스포라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다. 권정생의 글이 가진 애잔함이 전편에 깔려있다. 그가 들려주는 개인사는 민족사와 중첩돼 있기에 애틋하다. 민족의 쇠태가 개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곤 하지만 일제시대만큼 서럽고 애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 시기를 일본에서 지내야 했던 동포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가슴 저린다.

'슬픈 나막신'의 주된 인물은 권정생의 다른 글처럼 아이들이다. 그의 대표작인 '몽실 언니'나 '점득이네'처럼 아이들의 눈으로 그려지는 역사의 단면들이 시.공간적 배경이 된다. 일본 동경의 혼마찌라는 동네는 우리나라의 산동네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다. 그 곳에 준이네가 살고 있다. 형편은 다른 집들과 매한가지지만 준이네는 좋은 부모님이 건재해 계신다. 큰 형은 전쟁터에 가 있고 현재는 작은 형 걸이와 누나 남이, 그리고 준이가 있다. 준이네는 조선인들의 모범이 될 만큼 좋은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

준이에게는 여러 친구들이 있다. 하나꼬와 에이꼬, 분이와 용이, 그리고 친구이자 라이벌인 카즈오가 있다. 하나꼬와 에이꼬는 준이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하나꼬는 여동생을 고아원에 둔채 홀로 입양된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에이꼬는 병든 아버지를 잠깐씩이라도 돌봐드려야 하는 짐이 무거운 소녀다. 분이도 준이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제 처지를 잘 알기에 속만 끓일 뿐이다. 분이 엄마 호남댁은 술장사를 한다. 삶에 지친 호남댁은 분이에게 어린 동생들을 떠맡기고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신다. 어린 분이는 엄마의 돌봄도 받지 못한채 자주 엄마에게 두들겨 맞는다. 엄마의 화가 풀릴 때까지 집 근처는 갈 수도 없고 그럴 때 찾게 되는 준이네집은 부럽기만 하다.

아이들의 삶은 어른들이 만드는 모양에 따라 여러 형태를 보인다. 삶에 지치기는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갈수록 잦아지는 공습 경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먹을거리는 줄어들기만 한다. 남학생들은 전쟁터로 내몰리고 걸이는 남의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하는 상황이 기막히기만 하다.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걸이는 울기보다는 차라리 웃음을 택하기로 한다. 명분을 찾을 수 없는 전쟁터에 아들 둘을 내보낸 준이 부모의 마음과, 일장기를 흔들며 자식을 보내는 일본인의 애국심이 병치되며 전쟁의 광기는 극명히 부각된다. 힘없는 민초들은 아픔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 아픔은 슬픔이 되어 가슴에 흐른다.

권정생은 역사 속에 놓인 사람들의 힘없는 삶을 잊지 않고 그려준다. 그들은 꼼짝 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맥없이 사라지거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개중엔 죽음의 의미 조차 찾을 수 없는 것도 적잖았다. 그러나 허망함과 좌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정생이 놓지 않은 한 가지는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였다. 그 끈이 없었다면 인생의 허무함에 우리의 고개도 저절로 떨어졌으리라. 이글거리는 세상의 증오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작은 힘을 붙잡은 그의 갸날픈 손은 소중한 가치를 놓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반어적으로 알려준다. 그 힘은 주목하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모를 존재의 미약함을 택해 세상의 가장 큰 희망을 그 속에서 발견하려는 가치의 위대함에 있다.

그가 떠난지 벌써 4년이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한바탕 울고 난 뒤의 후련함이 아닌 가만가만 들려주던 자장가같은 그의 읊조림은 이제 큰 물줄기가 되었다. 그의 글이 다시 조명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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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에 전관예우란 없다 - 카피라이터 이규용이 만난 스타 PD들
이규용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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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시청자에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점에서 방송은 권력이다. 방송이 가진 권력은 비강제적이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방송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프로그램을 통해 전한다. 그 프로그램의 책임자를 우리는 PD라 부른다. PD는 방송의 꽃이라고도 한다. 꽃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린다면 방송국 안에서 PD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방송 매체는 일반 조직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각 프로그램은 조직의 관리 감독하에 있지만 실질적 책임은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PD가 진다. 따라서 PD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책임에 따른 권한 행사로 권력이 생기며 권력을 행사할 수 도 있다. 어떤 한 프로그램의 성격과 방향성은 PD의 시각에 의해 결정된다. 상부로부터 기획안의 재가가 나면 실질적 수장인 PD에 의해 같은 기획, 다른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다. 방송가 사람들이 PD의 행보를 주시하는 이유이다.

PD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자조적 표현을 하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를 부러워한다. 이제 PD는 방송쪽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주목 받는 반 연예인이 되었다. 그 PD들의 세계를 광고 스페셜리스트인 이규용이 안내한다. 이규용은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MBC 자회사인 MBC 프로덕션의 이사를 지냈다. 이 책은 그가 MBC에서 정년 퇴임한 후 사단법인 독립제작사협회의 편집위원으로 있을 때 외주제작사 PD와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바닥에 전관예우란 없다.' 책 제목이 은근히 도발적이다. 그러나 이 제목은 방송국이 얼마나 무한경쟁의 세계인지를 반의적으로 보여준다. 선배로서의 경륜은 인정하지만 현장에서는 동등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범상치 않은 제목이야말로 이 바닥의 생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PD라는 직업이 참 고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의 패기와 실험정신을 나이 먹은 사람이 쫓아가는게 얼마나 버거운지 조금 알기에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PD라는 직업은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다. 한 조직의 구성원이며 실질적 책임자이며 예술적 성향을 가진 연출자이며 자기휘하의 많은 사람을 다독여야 하는 지휘자이다. 만일 장인으로서의 PD가 궁금하다면 이규용이 만난 이들을 추천하고 싶다. 이규용이 만난 13명의 PD들은 오늘날 방송의 현 주소를 만들어준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방송국에 있다가 이제는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이자 아직도 특별한 방식의 연출을 꿈구는 현업 PD들이다.

그러나 제 2의 인생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갑'이 아닌 '을'의 자리는 무척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바닥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고 계산적이지 못해 사서 하는 고생도 있는 것 같다.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장인정신이야 누구 못지 않고 그래서 상을 휩쓸듯이 했지만 독립프로덕션의 대표라는 현실로 잠 못드는 고초를 겪고 있나 보다. 그래도 표정들은 밝으니 천상 방송장이이다.

이규용이 만난 PD의 면면은 이렇다. 방송 사상 최초로 大PD 직위를 받은 장기오 PD,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방송'으로 사람들을 울린 홍성 PD, '만원의 행복'의 이재준 PD, 아주 오래 전이지만 잊을 수 없는 드라마 '수사반장'과 '호랑이 선생님'의 김승수 PD, 한류가 안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아름다운 날들' '별을 쏘다' '천국의 계단' 의 이장수 PD,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정수웅 PD, 진지한 성찰을 프로그램으로 빚어내는 자유정신의 박성주 PD, 포토 에세이를 통해 사진의 미학을 선보인 오주환 PD, 음식 문화의 혁명을 일으킨 김승회 PD, 컨텐츠의 멀티유스에 전력하는 조한선 PD, PD와 기자의 경계를 허문 김민호 PD, 섬세한 직조능력과 단정함을 넘어 이제는 화려한 연출까지 시도하는 '궁'의 황인뢰 PD까지 모두 열 셋이다.

하나같이 쟁쟁하고 하나같이 만만찮으며 뚝심과 자부심으로 험한 세월을 버티어 온 사람들이다. 그들과의 만남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지나온 시간의 표현법이 질박하고 소탈해 내겐 숭늉처럼 편안하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규용의 차용 어휘가 중년인 내게도 더러 어려웠고,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세대차가 꽤 날 듯 해서이다. 또한 그들의 외곬수적 성향도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방송의 진면목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을 타 도서와 구별되게 한다. 실제 방송 현장은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곳으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프로 정신의 구현장이다. 프로의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방송계에선 생존이나 존립이 힘들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앎에도 이규용은 그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직업정신의 예술적 승화로까지 이끌어갔다. 그의 두둑한 뱃심이 만만찮다. 그 저력으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며 대담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

일과 사람은 한 몸이지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로 표현되고 일은 그 사람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 둘이 일치되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이 책에는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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