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나막신 우리문고 1
권정생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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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 길이 없어 타국을 향해 보따리를 싸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디아스포라를 감행했던 용기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토피아는 없었다. 단지 최소한의 먹을 것이 그 곳에 있었을 뿐이다. 살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했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들의 삶은 그 곳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이어가게 된다. 남의 땅에서 그들의 언어를 쓰는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슬픈 나막신'은 디아스포라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다. 권정생의 글이 가진 애잔함이 전편에 깔려있다. 그가 들려주는 개인사는 민족사와 중첩돼 있기에 애틋하다. 민족의 쇠태가 개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곤 하지만 일제시대만큼 서럽고 애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 시기를 일본에서 지내야 했던 동포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가슴 저린다.

'슬픈 나막신'의 주된 인물은 권정생의 다른 글처럼 아이들이다. 그의 대표작인 '몽실 언니'나 '점득이네'처럼 아이들의 눈으로 그려지는 역사의 단면들이 시.공간적 배경이 된다. 일본 동경의 혼마찌라는 동네는 우리나라의 산동네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다. 그 곳에 준이네가 살고 있다. 형편은 다른 집들과 매한가지지만 준이네는 좋은 부모님이 건재해 계신다. 큰 형은 전쟁터에 가 있고 현재는 작은 형 걸이와 누나 남이, 그리고 준이가 있다. 준이네는 조선인들의 모범이 될 만큼 좋은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

준이에게는 여러 친구들이 있다. 하나꼬와 에이꼬, 분이와 용이, 그리고 친구이자 라이벌인 카즈오가 있다. 하나꼬와 에이꼬는 준이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하나꼬는 여동생을 고아원에 둔채 홀로 입양된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에이꼬는 병든 아버지를 잠깐씩이라도 돌봐드려야 하는 짐이 무거운 소녀다. 분이도 준이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제 처지를 잘 알기에 속만 끓일 뿐이다. 분이 엄마 호남댁은 술장사를 한다. 삶에 지친 호남댁은 분이에게 어린 동생들을 떠맡기고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신다. 어린 분이는 엄마의 돌봄도 받지 못한채 자주 엄마에게 두들겨 맞는다. 엄마의 화가 풀릴 때까지 집 근처는 갈 수도 없고 그럴 때 찾게 되는 준이네집은 부럽기만 하다.

아이들의 삶은 어른들이 만드는 모양에 따라 여러 형태를 보인다. 삶에 지치기는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갈수록 잦아지는 공습 경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먹을거리는 줄어들기만 한다. 남학생들은 전쟁터로 내몰리고 걸이는 남의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하는 상황이 기막히기만 하다.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걸이는 울기보다는 차라리 웃음을 택하기로 한다. 명분을 찾을 수 없는 전쟁터에 아들 둘을 내보낸 준이 부모의 마음과, 일장기를 흔들며 자식을 보내는 일본인의 애국심이 병치되며 전쟁의 광기는 극명히 부각된다. 힘없는 민초들은 아픔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 아픔은 슬픔이 되어 가슴에 흐른다.

권정생은 역사 속에 놓인 사람들의 힘없는 삶을 잊지 않고 그려준다. 그들은 꼼짝 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맥없이 사라지거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개중엔 죽음의 의미 조차 찾을 수 없는 것도 적잖았다. 그러나 허망함과 좌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정생이 놓지 않은 한 가지는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였다. 그 끈이 없었다면 인생의 허무함에 우리의 고개도 저절로 떨어졌으리라. 이글거리는 세상의 증오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작은 힘을 붙잡은 그의 갸날픈 손은 소중한 가치를 놓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반어적으로 알려준다. 그 힘은 주목하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모를 존재의 미약함을 택해 세상의 가장 큰 희망을 그 속에서 발견하려는 가치의 위대함에 있다.

그가 떠난지 벌써 4년이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한바탕 울고 난 뒤의 후련함이 아닌 가만가만 들려주던 자장가같은 그의 읊조림은 이제 큰 물줄기가 되었다. 그의 글이 다시 조명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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