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에 전관예우란 없다 - 카피라이터 이규용이 만난 스타 PD들
이규용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다수의 시청자에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점에서 방송은 권력이다. 방송이 가진 권력은 비강제적이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방송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프로그램을 통해 전한다. 그 프로그램의 책임자를 우리는 PD라 부른다. PD는 방송의 꽃이라고도 한다. 꽃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린다면 방송국 안에서 PD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방송 매체는 일반 조직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각 프로그램은 조직의 관리 감독하에 있지만 실질적 책임은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PD가 진다. 따라서 PD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책임에 따른 권한 행사로 권력이 생기며 권력을 행사할 수 도 있다. 어떤 한 프로그램의 성격과 방향성은 PD의 시각에 의해 결정된다. 상부로부터 기획안의 재가가 나면 실질적 수장인 PD에 의해 같은 기획, 다른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다. 방송가 사람들이 PD의 행보를 주시하는 이유이다.

PD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자조적 표현을 하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를 부러워한다. 이제 PD는 방송쪽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주목 받는 반 연예인이 되었다. 그 PD들의 세계를 광고 스페셜리스트인 이규용이 안내한다. 이규용은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MBC 자회사인 MBC 프로덕션의 이사를 지냈다. 이 책은 그가 MBC에서 정년 퇴임한 후 사단법인 독립제작사협회의 편집위원으로 있을 때 외주제작사 PD와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바닥에 전관예우란 없다.' 책 제목이 은근히 도발적이다. 그러나 이 제목은 방송국이 얼마나 무한경쟁의 세계인지를 반의적으로 보여준다. 선배로서의 경륜은 인정하지만 현장에서는 동등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범상치 않은 제목이야말로 이 바닥의 생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PD라는 직업이 참 고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의 패기와 실험정신을 나이 먹은 사람이 쫓아가는게 얼마나 버거운지 조금 알기에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PD라는 직업은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다. 한 조직의 구성원이며 실질적 책임자이며 예술적 성향을 가진 연출자이며 자기휘하의 많은 사람을 다독여야 하는 지휘자이다. 만일 장인으로서의 PD가 궁금하다면 이규용이 만난 이들을 추천하고 싶다. 이규용이 만난 13명의 PD들은 오늘날 방송의 현 주소를 만들어준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방송국에 있다가 이제는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이자 아직도 특별한 방식의 연출을 꿈구는 현업 PD들이다.

그러나 제 2의 인생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갑'이 아닌 '을'의 자리는 무척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바닥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고 계산적이지 못해 사서 하는 고생도 있는 것 같다.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장인정신이야 누구 못지 않고 그래서 상을 휩쓸듯이 했지만 독립프로덕션의 대표라는 현실로 잠 못드는 고초를 겪고 있나 보다. 그래도 표정들은 밝으니 천상 방송장이이다.

이규용이 만난 PD의 면면은 이렇다. 방송 사상 최초로 大PD 직위를 받은 장기오 PD,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방송'으로 사람들을 울린 홍성 PD, '만원의 행복'의 이재준 PD, 아주 오래 전이지만 잊을 수 없는 드라마 '수사반장'과 '호랑이 선생님'의 김승수 PD, 한류가 안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아름다운 날들' '별을 쏘다' '천국의 계단' 의 이장수 PD,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정수웅 PD, 진지한 성찰을 프로그램으로 빚어내는 자유정신의 박성주 PD, 포토 에세이를 통해 사진의 미학을 선보인 오주환 PD, 음식 문화의 혁명을 일으킨 김승회 PD, 컨텐츠의 멀티유스에 전력하는 조한선 PD, PD와 기자의 경계를 허문 김민호 PD, 섬세한 직조능력과 단정함을 넘어 이제는 화려한 연출까지 시도하는 '궁'의 황인뢰 PD까지 모두 열 셋이다.

하나같이 쟁쟁하고 하나같이 만만찮으며 뚝심과 자부심으로 험한 세월을 버티어 온 사람들이다. 그들과의 만남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지나온 시간의 표현법이 질박하고 소탈해 내겐 숭늉처럼 편안하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규용의 차용 어휘가 중년인 내게도 더러 어려웠고,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세대차가 꽤 날 듯 해서이다. 또한 그들의 외곬수적 성향도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방송의 진면목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을 타 도서와 구별되게 한다. 실제 방송 현장은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곳으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프로 정신의 구현장이다. 프로의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방송계에선 생존이나 존립이 힘들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앎에도 이규용은 그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직업정신의 예술적 승화로까지 이끌어갔다. 그의 두둑한 뱃심이 만만찮다. 그 저력으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며 대담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

일과 사람은 한 몸이지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로 표현되고 일은 그 사람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 둘이 일치되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이 책에는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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